Prologue
1620년 9월 16일 영국의 플리머스(Plymouth)에서 102명의 승객과 약 30명의 선원을 태운 범선이 항해를 시작한다. 이 배는 이후 66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11일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다. 그 배의 이름은 바로 메이플라워(May Flower)호였다.
이들은 영국 제임스 1세의 종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한 청교도들이었으며, 스스로의 질서와 안녕 유지를 위해 시민정치제도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는 향후 미국 역사의 토대가 된다.
목차
1. 대륙지폐
영국은 식민지인 미국 내에 은행이 설립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식민지 시절의 북미 대륙에서는 영국이 발행한 식민지 화폐나 스페인 달러와 같은 외국 돈이 주로 통용됐을 뿐이다. 영국의 계속된 미국 식민지 탄압은 지속적인 갈등을 초래하였다.
미국 내 13개 식민지가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 <바로가기>라는 이름의 공동 회의체가 구성되었고, 대륙회의는 영국과의 실질적인 단교를 선언하였는데 이는 곧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1775년 6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바로가기> 장군은 식민지군의 총지휘관으로 선임됐으며, 대륙회의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775년 6월에 대륙지폐(Continental Currency)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드디어 정식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대륙지폐는 원래 금이나 은으로 태환해 줄 것을 예정하고 발행된 지폐였지만, 무분별한 발행과 태환의 약속도 지키지 못해 곧 가치가 크게 떨어져 1779년 수명을 다한다.
2. 달러와 금
미국이 공식적으로 달러를 국가 화폐로 만든 것은 1792년의 화폐법이다. 미국은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1:15로 고정시킨 상태에서 복본위제를 실시했지만 은화가 주로 사용됐다. 미국이 최초의 달러 지폐를 발행한 것은 1862년이었다.
달러의 어원은 체코 동남부 보헤미아(Bohemia) 지방의 한 골짜기에서 유래됐다. 1516년 은광이 발견된 이것에 촌락이 이뤄지며, 그 지역을 '골짜기'라는 의미의 '다스 탈(Das Tal)'로 불렀다. 이 지방의 은으로 은화를 만들면서 명칭은 탈러(Taler)가 됐고 이후 음운 변화를 통해 달러(Dollar)가 됐다.
(1) 은 위주의 복본위제 시기(1792~1834)
이 시기의 미국은 금과 은 두 개의 금속을 본위로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실시했지만, 사실상 은 위주의 은본위제와 유사했다. 화폐법 상에는 1달러를 만들 때 416 그레인(grain)의 주화에 371.25 그레인의 순은을 포함하도록 정의했다.
한편 1달러 은화와 함께 금화도 같이 발행됐는데 10달러 금화와 2.5달러 금화가 발행됐고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15로 고정됐다.
1820년대에 국제 금값이 급상승하여 주화 제조에 사용된 금속의 값어치가 주화의 액면을 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국제 시세를 제때에 반영하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영국 은행으로 유입된 미국의 달러 금화는 즉시 녹여져서 영국의 주화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2) 금 위주의 복본위제 시기(1834~1862)
1834년 6월 28일 미국은 화폐법을 개정하면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1:15에서 1:16으로 수정하였다. 이는 국제 금 가격의 상승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미국의 은이 빠르게 사라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상거래에서는 금화만 남게 되어 금을 위주로 한 복본위제가 실시된다.
(3) 미국 최초의 불태환 지폐(1862~1879)
미국은 4년에 걸친 남북전쟁(1861~1865) <바로가기>을 겪으면서 심한 재정상의 압박을 받게 되고 국채와 함께 금과 은으로 태환 되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발행한 채권의 총액은 태환 해줄 수 있는 범위의 금은을 훨씬 넘어섰고, 은행들은 사실상 태환을 멈추게 되었다.
1862년 미국은 사상최초로 태환 되지 않는 종이돈인 달러 지폐를 발행하고 이를 법정화폐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17년 간은 '종이돈'이 활약한 시기가 된다.
최초의 미국 지폐는 그린백(Greenback)으로도 불렸는데 지폐 뒷면의 대부분이 초록색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백은 미국 내 모든 거래에서 법정화폐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국제 무역에 따른 관세나 국가의 부채에 붙는 이자는 금이나 은으로 지불해야 했다.
(4) 진정한 금본위제(1879~1933)
1862년 이후 마구 발행한 그린백은 전쟁 중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매달 평균 10%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1865년이 되자 남부 지방의 물가는 4년 만에 전쟁 전에 비해 무려 92배 가까이 폭등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 의회는 다시 예전처럼 금속 본위제도로 돌아가고자 했고, 이 때문에 그린백의 유통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1870년 미국은 드디어 그린백과 1달러 금화의 가격을 동등하게 맞추는 데 성공하여 관세도 그린백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미국 정부는 다시 금본위제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때부터 법정화폐인 지폐를 국가가 발행하되 그 가치를 금과 태환되도록 약속하는 금본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5) 유사 금본위 시대(1934~1973)
지폐를 발행할 때마다 해당하는 금을 보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30년대 초반 연방정부는 태환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금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이에 금본위제의 안정성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은행으로부터 대거 금 인출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1933년 미국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바로가기>는 행정명령 6102호를 통해 '미국 내에 금화, 금괴, 금 증서를 비축하는 것을 금지'하며 사적으로 보유하지 못하게 하였고, 달러는 금으로 태환 되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이런 조치를 내린 근거는 1917년에 제정된 적성국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이었다.
이 시기의 미국의 통화 시스템은 금본위를 표방한 유사 시스템으로 변형돼 운영되었으며, 그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열린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서의 국제 통화협정은 미국 달러를 소위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리면서 미국 중심의 새로운 경제 재편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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