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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아편전쟁

by y2ryang 2025.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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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2. 가장 비열했던 무역

3. 청의 몰락

청나라 무역에 관한 사진

 

1.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경제학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만 고센(Hermann Gossen)의 이름을 따 '고센의 제1법칙'이라고도 불린다. 그 내용은 '같은 재화를 반복해서 소비할 때 개인이 느끼는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짜장면을 먹으면 만족도가 매우 높을 것이다. 그런데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또 한 그릇을 먹으면 첫 번째 그릇만큼 맛있을 수가 없다.

    수입이 1,0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증가하면 날아갈 듯 기쁘다. 하지만 수입이 1억에서 1억 1,000만 원이 되면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같은 1,000만 원의 수입 증가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계효용의 법칙에도 예외가 있다.

    바로 마약이다.

    마약의 핵심은 중독성이다. 다른 재화는 사용할수록 지겨워진다. 하지만 마약의 중독성은 이 지겨움을 상쇄하며 더 많은 양을 열망하게 된다. 

    기업이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같은 상품으로는 소비자들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약은 혁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파렴치한 제국주의자들은 결국 마약을 돈벌이 수단으로,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 말았다. 이 몰염치함으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Opium Wars, 1840~1842, 1856~1860)이다.

 

    <산업혁명, 청의 인구 앞에 무용지물>

 

    일반적으로 공업이 발달한 선진국과 농업 및 어업에 주력하는 개발도상국이 무역을 하면 선진국이 단연 유리하다. 

    그런데 18세기 세계 무역 시장에서 이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가 등장했다. 바로 중국, 즉 청나라다.

    당시 최강의 공업 국가로서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입었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18세기 말 청의 인구는 이미 3억 명을 넘어섰다. 전 세계 인구의 약 30% 정도가 중국의 인구였던 셈이다. 게다가 강력한 황제가 지배하는 봉건 시스템을 기반으로 이 많은 인구를 싼 가격에 부려먹을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수출품은 싸고 질 좋은 명직물이었는데, 청은 자국에 필요한 양질의 천을 저렴하게 생산했었다. 

    반면 청의 주력 제품은 영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들, 즉 차(茶)와 도자기, 비단 등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도자기과 가구, 그리고 부드러운 비단에 열광했다. 게다가 커피의 최대 소비국이었던 영국은 18세기 들어 갑자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과의 무역으로 인해 막대한 은화를 감당하느라 영국의 은화가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2. 가장 비열했던 무역

 

    영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무역 적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영란전쟁 이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국가를 누르고 인도 지역을 장악했다. 인도 일대에는 유럽에서 마취제로 널리 사용됐던 양귀비꽃이 널리 재배되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아편의 중독성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에 따르면 1775년만 해도 청에 유입된 아편의 양은 고작 75톤이었으나, 1839년 2,553톤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아편 대금은 은으로 지불되었는데, 영국은 아편 하나로 무역 적자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었다. 

 

3. 청의 몰락

 

    아편중독자가 급증한 청나라는 더 이상 정상적인 국민경제활동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한 국가가 되었다. 이에 청 황실은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아편이 수입되던 광둥지역으로 파견하였다.  '흠차대신'은 황제의 전권을 행사하는 관리로서 엄청난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1839년, 임칙서는 아편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했고,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해 물에 녹여 버렸다. 

    세계 곳곳을 무력으로 침탈 중이던 영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840년 6월, 영국은 약 4,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으로 진격했고, 이로써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중국과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침탈해 온 영국은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을 벌인다.

 

    그 결과,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난징조약(1842)은 청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 조약에서 청은 영국에게 전쟁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한 아편 보상금 2,100만 달러를 물어야 했고, 홍콩을 넘겨주는 치욕까지 겪었다. 또한, 상하이 등 다섯 개의 항구를 굴욕적으로 개항하게 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아편과 별 상관이 없었다. 청의 개방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막무가내로 벌인 전쟁이었다. 또다시 참패한 청은 텐진조약(1858)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편 무역을 합법화한다'라는 항목까지 삽입했다. 

 

    역사상 가장 비열했던 무역 전쟁은 이렇게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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