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유럽의 두 나라
유럽에는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두 나라가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섬나라로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과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의 영문 표기는 'Netherlands'이지만 네덜란드어로 표기하면 'Nederland', 즉 '낮은(neder) 땅(land)'이라는 뜻이 된다. 네덜란드 국토의 26%가 해수면 보다 낮다.
네덜란드인들은 바다를 댐으로 막은 뒤 바닷물을 퍼내 지금의 육지로 개척했다. 현재 국토의 상당 부분이 이렇게 만들어진 땅이다. 암스테르담(Amsterdam)이나 로테르담(Rotterdam)의 '담'이 들어간 곳들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는 섬나라 영국과 함께 17세기에 바다의 주인 자리를 놓고 영국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2.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빠르게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드넓은 국토를 가지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에게 바다는 부를 축적할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초반까지 조선업 분야에서 유럽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무역을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추와 향신료를 찾아 먼 거리를 배로 이동했는데, 폭풍우를 만나거나 해적을 만나는 등의 이유로 반드시 배가 통째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선주 한 사람이 배를 만들어 무역을 하면, 성공했을 때의 이익은 크지만 실패했을 때 입는 타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이러한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사업을 주도하는 자가 투자자, 즉 주주들을 모집하여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가 바로 주식회사다.
1602년, 이런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회사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다.
물론 영국이 1600년 동인도회사를 먼저 설립했지만 그 실상은 느슨한 상인들의 연합체였을 뿐 주주들의 권리를 위해 문서로 주식을 발행한 회사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였다.
동인도회사의 재량권은 상당히 컸다. 정부로부터 권한을 받아 자신들이 진출한 땅에서 치안권과 군사권을 빠르게 장악했다. 심지어 동인도회사의 대표가 그 지역의 식민지 총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유럽인들은 후추 같은 향신료에 열광했고, 인도 및 동남아시아와 독점 무역을 하기 위하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으나 점점 총을 앞세워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동인도회사는 이름만 무역회사였을 뿐 사실상 식민지 지배 기구였다.
3.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무역에 대한 경제학의 관점은 자유무역 사상과 보호무역 사상이다.
<보호무역>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경제 이론을 보통 중상주의(重商主義)라고 부른다. 중상주의자들은 무역을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여긴다. 제로섬 게임이란 게임 참가자들이 얻는 이익의 총합이 항상 제로(0)인 상황을 뜻한다. 누군가가 10원의 이익을 얻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10원의 손실은 입는다는 뜻이다.
<자유무역>
자유무역주의자들은 무역을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으로 본다. 포지티브섬 게임은 게임 참가자들이 모두 이익을 얻는 상황을 뜻한다. 누군가가 10원의 이익을 얻었다고 다른 누군가가 꼭 10원의 손실을 입을 필요가 없고, 그 다른 누군가도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면 우리와 무역을 하는 나라는 반드시 우리의 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상주의는 역사적으로 16~18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경제사상이다. 당시 중상주의자들이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 이유는 한 나라의 국부를 그 나라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비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과 은의 총량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영란전쟁(Anglo-Dutch Wars, 1652~1784)이 발발한 17세기, 영국의 통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강력한 중상주의 지지자였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금욕주의를, 외부적으로는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국가를 통제했다.
낭비와 사치는 금과 은의 소비가 수반되므로 금욕주의 강조했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상대 국가를 정벌해 금과 은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주의가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4. 바다의 지배자
올리버 크롬웰은 바다를 이용해 활발한 무역을 벌이던 네덜란드가 눈엣가시로 여겼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개무역의 최강자였다. 또한, 영국은 네덜란드의 뛰어난 선박기술과 항해술 때문에 영국 자신들의 식민지 국가와 무역을 할 때에도 네덜란드 상선을 이용해야 했다. 식민지 착취 이익을 네덜란드와 공유해야만 했다.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영란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항해조례(NAvigation Acts)를 발표하고 네덜란드의 무역에 훼방을 놓았다.
1652년, 항해조례를 지키지 않은 네덜란드 상선을 나포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됐고, 급기야 그 해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이 시작됐다. 이후 두 나라는 제2차(1665~1667), 제3차(1672~1674), 제4차(1780~1784) 전쟁을 벌인다.
제3차 전쟁까지는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3차 전쟁 이후 상황은 영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엄청난 식민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거듭하던 영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 중이었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을 영국에 양도한 탓에 북아메리카 지역의 거점이 사라졌고,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독점할 수 없게 되어 영국에 대적할 기반을 서서히 잃어 갔다. 게다가 이웃 프랑스와의 잦은 갈등으로 네덜란드의 국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결국, 1784년 5월 네덜란드는 굴욕적인 항복을 선언했고, 새로운 바다의 지배자 영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바탕으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다의 지배자가 된 영국은 이후 열렬한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된다. 다시 말해 영국은 때에 따라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자국의 이익에 맞게 제멋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