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군주의 자질을 여우와 사자에 비유했다. 영악하고 잔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적의 덫을 피하고, 간교한 이리를 쫓아낸다. 조직 관리에서 무기력한 선은 악보다 더 나쁘다.
진정한 마키아벨리스트 숙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수렴청정을 단호히 거절했다.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나 부왕이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아서인지 조숙했고, 그만큼 명석한 데다 승부사 기질이 넘쳤다.
1. 카리스마는 나이와 무관하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데다 현종에게 후궁도 없어 역대 왕자들 중 가장 원만하게 승계했다. 당시 열네 살로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절하고, 과감하게 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숙종은 먼저 최고 실세 송시열의 기를 꺾는 일부터 시작했다. 송시열은 17세기 중엽 붕당정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서인의 영수 겸 사상적 지주로, 인조, 효종, 현종 세 왕을 모셨다. 또한, 효종의 왕자 시절 스승이었고, 현종 때는 1차 예송 논쟁을 벌여 남인을 제압했다. 송시열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배후에서 조정을 움직이는데 능했으며, 모략에 능하고 과격한 원칙주의자였다.
숙종이 즉위 후 2차 예송 논쟁 때 밀려난 송시열을 다시 등용하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송시열은 거절했다. 그다음 송시열의 제자인 이조참판 이단하에게 '현종 행장'을 쓰도록 하였으나 이단하는 스승 송시열을 욕보일 수 없다며 사직을 청했다.
"스승만 있고 임금은 없는 자로구나!" 기다렸다는 득 숙종은 이단하를 파직하였다. 그와 함께 중앙 정계에서 서인을 내쫓고 남인에게 정권을 쥐여주었다. 이것이 '갑인환국'이다. 다음 해인 1675년 1월 13일 송시열을 유배 보냈다.
이렇게 소년 숙종은 집권 첫해부터 송시열과 서인의 기를 꺾었다.
숙종 1년(1675), 팔도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신분증명서인 '지패법'을 실시한다. 그러나 신분증이 종이라 물에 젖어 번지는 단점이 발생하자 호패로 바꾸었다. 호패법 덕분에 유민이 대폭 줄었다.
남한산성 외에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한양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일본과 협상을 벌여 울릉도의 조선 귀속을 확실하게 했다.
2. 환국정치의 달인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이 현종 때까지 대체로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남인이 한 축을 이루며 대립했다. 이후 숙종의 장기 치세 중에 남인이 장희빈과 함께 몰락하고, 그 후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싸움으로 전환된다.
이전의 왕들도 집권 세력을 교체하는 환국을 단행했지만 숙종의 환국은 이전 왕들이 몇 대신만 교체하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환국 단행 시 대신들을 모두 내쫓고 새로 채웠다. 그만큼 기존의 세력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환국이 발생할 때마다 충신과 역적이 바뀌어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어 줄줄이 처형당했다. 치밀한 데다 집중력까지 강한 숙종 앞에 언제 운명이 바뀔지 모르는 신하들은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숙종이 해낸 업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대동법을 도입한 지 100년 만에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둘째, 상평통보를 상용화해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청나라와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숙종은 남인의 영수인 허적을 영의정에 임명하면서도 병조판서는 명성왕후의 사촌 동생 김석주를 시켰다. 차츰 남인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숙종은 환국의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숙종 6년(1680) 각본에 따른 것처럼 허적의 서자 허견이 형틀에 묶였다. 허견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함께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였다. 이렇게 시작된 경신환국을 '삼복의변'이라고도 한다.
남인이 몰락하고 다시 서인 세상이 되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다시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3. 남인 장희빈 대 서인 송시열
인현왕후도 아이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총애하는 희빈 장씨에게서 왕자 윤을 보았다. 숙종 14년(1688) 10월 27일이었다. 숙종이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니, 서인들이 인현왕후가 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숙종은 곧바로 윤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에 서인의 노론을 대표해 송시열이 "갓난애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며 숙종을 훈계하는 듯한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렸다. 숙종의 노여움을 읽은 신하들이 송시열을 비난하며 사대부 중인 출신이었던 장희빈을 지지하게 되었다.
장희빈은 본래 양반이 아니었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중인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이들이 거대 자산가가 된 배경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있다. 청나라는 일본과의 외교를 1551년부터 단절한 상황이었다. 일본이 청나라 물건을 구입하려거나 자국의 상품을 청나라로 팔려면 조선의 왜관을 통할 수밖에 없어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는 역관들이 이러한 중계 무역권을 확보했다. 이런 배경에서 변승업, 장현 등 조선 최고 갑부들이 탄생했다. 장현은 장희빈의 삼촌이었다.
장현은 특히 남인 세력들과 친밀했다. 이들이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맹비난하고 나선 것이었다. 다음 날 송시열은 관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제자인 영의정 김수흥도 파직되었다. 그후 송시열에게 정읍군에서 사약을 내려보냈다.
항상 숙종은 한 세력이 비대해졌다 싶으면 어떠너 빌미든 잡아 일망타진했다. 50년 권세의 송시열을 제거하고 그를 추종하는 서인들도 유배 보냈다. 내친김에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한 다음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았다. 이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내세운 남인들이 기적처럼 정권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4. 각기 왕자를 앞세운 소론과 노론
장희빈이 중전이 된 지 6년째 되던 어느 날, 숙종은 달밤에 후원을 거닐다 한 나인이 떡을 빚는 모습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 모습이 단아해 들어가 보니 인현왕후의 몸종 최씨였다. 그날 밤 최씨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잉태하며 숙종은 중전보다 최씨에게 더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이를 기회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서인 세력이 '민씨 복위 운동'을 추진한다. 숙종도 남인 세력이 비대해졌다고 보고 서인의 손을 들어주어 숙종 20년(1694)에 갑술환국을 일으켰다.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민씨가 다시 중전으로 복귀하였으며, 소인 세력 중 소론이 정국을 주도한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서른다섯 나이로 병사한다. 희빈 장씨가 취선당 쪽에서 신당을 차려놓고 매일같이 중전 민씨가 죽기를 염원하며 굿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소문을 확인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에 소론이 나서서 용서서를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단호히 거절하고 소론의 대신들인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까지 귀양 보냈다.
조정에서 왕세자(경종)를 옹호하는 소론은 대폭 줄고, 왕자(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은 대폭 늘었지만, 두 세력의 정쟁은 더 가열된다.
5. 소론과 노론의 입지 확보 다툼
정주 주자학을 신봉하는 노론은 양반의 지배구조와 지주제도를 유지하고자 했고, 소론은 중국도 버린 주자학 대신 양명학을 수용해 실용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들의 학문적 용도도 결국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양쪽을 지켜보던 숙종은 최석정을 삭직하고 송시열의 수제자인 노론의 이여를 영의정에 제수했다. 이후에도 숙종은 병신처분 등을 활용해 소론을 계속 숙청해 노론의 입지를 넓혀주었다.
숙종은 조선 왕 중 왕비를 가장 많이 두었다.
왕족이 아닌 사대부들은 권력확보에 왕비를 이용하려 했고, 숙종은 아홉 부인을 이용해 은막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듯 당쟁놀이를 벌이며 권력의 맛을 즐겼다. 영악한 숙종은 이 과정에서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를 이용했다.
당시 세계는 산업혁명 직전으로 시민계급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조선도 숙종이 상평통보를 적극 유통시키며, 물물교환보다 화폐경제가 활발하게 일어나 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했다. 이로써 사농공상 가운데 가장 아래에 속했던 상인들이 양반의 부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중 역관이 선두에 섰다.
숙종은 말년에 성인병을 다스리려 온천에서 반신욕을 즐겼으며, 예순 살에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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