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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현종(재위 1659~1674)

by y2ryang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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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어진

 

    현종은 조선 역대 왕으로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유일하다. 조선 땅이 아닌 청나라에서 출생했고, 왕비를 한 명만 두었으며, 재위 기간을 예론(禮論) 논쟁으로 보낸 점이다. 이 시기 서구에서는 뉴턴의 물리학 등 과학의 기초이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들이 치열하게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도 네덜란드 등과 통상하며 선진 문물을 도입하기 바빴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조선은 최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한 '예론'으로 세월을 보냈다.

 

1. 기해 예송 논쟁

 

    현종은 아버지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에 태어났다. 

    현종 즉위와 동시에 1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효종의 상중이었고 상복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비화했다.

    서인들은 당론으로 김자점의 무고로 죽은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신원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결국 효종의 왕위 계승에 하자가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효종은 누구든 강빈의 옥사를 거론하면 역률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이 재론하다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런 흐름이 현종 즉위 초에 예송 논쟁으로 다시 표면화한 것이다.

 

     본래 서인은 이이의 주리론, 남인은 이황의 주기론을 계승했다. 그런데 효종의 국상이 정치 논쟁화 되면서 양대 당은 학문적 논쟁은 뒤로하고, 생사를 건 권력 투쟁에 돌입한다. 이미 팔도에 예법 논쟁이 확산하며 재야의 선비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러한 상복 논쟁으로 침을 튀겼다. 

    현종의 아들 이순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왕권 행사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1차 예송 논쟁이 끝났다.

 

2. 15년 천재지변과 예송 논쟁

 

    현종 시기에 유달리 자연재해가 많았다. 특히 1670년과 1671년 두 해에 걸쳐 경신 대기근이 들었다. 태풍, 병충해, 홍수, 가뭄, 냉해 같은 5재(災)에 사람과 가축의 전염병, 겨울 혹한까지 겹쳐 8쟈(災)에 시달렸다. 이로써 700만 인구가 600만 아래로 줄어들었다. 이 시기는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는 소빙하기여서 역병과 재해가 조선뿐 아니라 세계를 휩쓸었던 것이다.

 

 

    조정은 당파 싸움을 하면서도 백성 구휼에는 당파를 떠나 전력을 다했다. 

    1661년부터 서인인 영의정 정태화가 중심이 되어 진휼청을 상설 기구로 만들어 백성의 복지를 담당했다. 

    한여름에도 우박과 서리가 내리고, 메뚜기 떼와 참새 1,000만 마리가 들판에 내려 곡물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런 전대미문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왕부터 신하가 똘똘 뭉쳤다.

 

    기해예송 논쟁 때 패배한 남인이 재기를 노리던 중 현종 15년(1674)에 기회가 찾아왔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으며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가가 다시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것이 갑인예송 논쟁이다. 

    예송 논쟁과 자연재해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기진한 현종은 서른네 살로 눈을 감았다.

 

    1, 2차 예송 논쟁이 조선 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대기근 시대였음에도 예절을 중시했다. 동성통혼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상피법이 제정되어 친족은 같은 부서나 송사를 맡지 않게 되었다. 하멜 등 네덜란드인 8명이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하멜 표류기>를 발간한 것도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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