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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영조(재위 1724~1776)

by y2ryang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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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진

 

    조선의 르네상스를 영조는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두 가지 소문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것은 전략적 사고를 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통치는 '혁명은 의지로 하지만 개혁은 정치로 한다'는 경구를 실감케 한다. 

    영조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전략적 리더의 통치는 무엇일까?

    첫째, 자기 절제가 강했다. 철학자 칸트처럼 일상이 규칙적이었으며, 고기와 술을 멀리 했고, 소식했다.

    둘째, 전략적 판단을 내릴 때 관련 자료를 살폈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경연을 무려 3,459회 열었다. 다양한 학자와 엄

             청난 양의 학식 있는 토론을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편>, <자성편>, <경세문답> 등 후세 왕들이 참고할 교

             훈서를 남겼다.

    셋째,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치 구조의 핵심을 추출해 냈다. 즉, 자료보다 해석을 더 중요시하였다.

    넷째, 어떤 결정도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 위험이 감당할만하고 가치 창출의 여지가 있는지를 살폈다.

 

1. 의심의 눈초리 속에 등극하다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 속에 왕이 되었다. 빈농의 딸 무수리가 낳은 '천한 소생'이라는 차가운 눈초리도 받아야 했다. 이 두 콤플렉스가 평생 영조를 짓눌렀다.

    경종이 죽자 목호룡의 고변을 기회로 노론을 역모로 엮어 대대적으로 숙청했던 소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다시 반등할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잡았다. 경종이 소론의 군주였다면 영조는 누가 봐도 노론의 왕이었다.

 

    영조가 즉위 일성은 '탕평'이었다. 동시에 붕당의 폐해를 하교했다. 붕당이 국정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주도해야 요순시대의 탕탕평평 치세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영조 1년(1725), 영조의 경종 독살설이 심화되자 영조는 소론과 화해를 한다. 그래서 영조는 탕평을 주장하고, 첫 내각을 소론 중심으로 구성했다. 영의정과 좌의정에 각각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을 , 우의정에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유봉휘를 발탁했다. 

    한편 노론은 영조에게 노론에게 진 부채를 갚으라며 소론을 정리하라고 압박했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영조는 숙종의 환국정치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후 자신의 탕평책이 막힐 때면 환국으로 정치판을 바꾸며 돌파한다. 

    영조와 노론은 소론을 대하는 목적이 달랐다. 영조는 명예 회복을, 노론은 복수를 원했다. 이에 소론 대신들을 몰아내고 영의정, 우의정 등의 요직에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 노론 인사들로 채웠다.

 

2. 이 나라가 노론과 소론만의 것이더냐

 

    영조는 여러 당파를 불러 녹두묵이 들어간 음식을 내놓고 '탕평채'라며 화합을 도모했다. 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송시열 계보의 제자들이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탕평책을 잡탕이라고까지 비하했다.

    노론의 소론 보복요구에 지친 영조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할 근본 대책을 모색하던 중 다시 정국을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정호, 민진원, 홍치중 등 노론 대신과 관료 140여 명을 일거에 축출하고, 그 자리를 2년 전에 파면했던 소론들로 채웠다. 이것이 영조 3년(1727)의 정미환국이다.

    이듬해 소론의 강경파가 남인을 포섭해 이인좌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소론 정권을 곤경에 빠뜨린다.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 독살에 가담했다는 것을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워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을 추대하고자 했다. 다행히 정미환국을 통해 소론이 권력을 잡으면서 도성 내 소론 세력이 반란에 호응하지 않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즉, 정미환국이 난을 진압하는 신의 한 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런 붕당정치의 현실솨 한계를 보면서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지나친 사람을 제거하며 당파를 고르게 하는 탕평책을 더 강력히 시행한다. 강경 붕당파가 탕평책을 비난하고 나설 때 영조가 호통 쳤다. "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더냐. 노론과 소론만의 나라라는 말인가?"

    초창기 탕평책의 인사정책은 노론과 소론의 균형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점차 능력 위주로 발전한다. 그래서 남인, 소북, 더 나아가 이들 사색당파에 속하지 않은 인물들까지 등용했다.

 

 3. 탕평책의 만성화에서 싹튼 사도세자의 비극

 

    탕평책이 25년 가까이 지속되다 보니, 온건파였던 각 당파의 권력 독점욕도 덩달아 자라났다. 이들의 계략에서 '사도세자 사건'이 잉태했다.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 때인 1749년부터 13년간 대리청정을 하는데, 이 시기에 남인, 소론, 소북 세력이 세자 중심으로 권력 장악을 시도한다. 사도세자는 이들을 가까이하며 노론을 멀리했고, 노론은 정순왕후 김씨 등과 결탁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영조는 애민의 군주였지만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좋으면 애착했고, 싫으면 지나칠 정도로 증오했다. 성장 경험 속에 녹아든 열등감과 정당성 확보 욕구 때문이었다. 

    연잉군 시절 혼인한 첫째 부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무자식이었고, 다음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를 낳았지만 영조 4년(1728)에 열 살 나이로 요절했다. 다른 후궁인 영빈 이씨도 화완옹주 등 딸만 낳았다.  그러다 1735년에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를 얻었다. 

    왕실에 큰 기쁨을 주며 태어난 사도세자는 매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열다섯 살이 되던 날 선위 교서를 내려 대리청정까지 하게 된 것이다.

 

    2년 후 효장세자의 빈 현빈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현빈 조씨의 빈소를 친히 찾았고, 거기에서 현빈 조씨의 궁녀 숙의 문씨를 만나 정을 통한다. 이때 노론이 숙의 문씨와 그녀의 오빠 별감 문성국과 결탁한다. 문성국은 동궁전 별감들을 매수해 세자의 사생활을 숙의 문씨에게 전해주었고, 그중 세자를 욕 먹일만한 것만 골라 숙의 문씨가 영조에게 고자질한다. 이때무터 영조와 사도세자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영조 33년(1757), 정성왕후가 서거했다. 영조는 예순 살 나이에 당시 열다섯 살 이었던 경주 김씨 정순왕후를 간택했다. 정순왕후 역시 숙의 문씨와 마찬가지로 영조와 사도세자를 무함하기 시작했다. 이에 영조는 틈만 나면 사도세자를 불러 질책했다.

    1755년 2월의 나주 벽서사건과 5월의 시권사건 즉, 과거시험장에서 경종 독살설을 거론하는 답안지가 나오며 영조는 돌변했다. 두 사건 모두 소론의 강경파 윤지, 이하징, 심정연 등이 연루되었다. 나주 벽서사건으로 60여 명의 소론 인사가 한양으로 압송되어 극형을 받았고, 시권사건으로 인해 영조는 세자의 소론 처벌 반대를 무시하고 매일 직접 국문하여 그들의 자식들까지 노비로 만들었다. 이에 노론 천하가 된 것이다.

   득세한 노론은 사도세자가 춘천에서 유생들을 모아 선동했으며 동궁전에 무기를 감출 땅굴을 파놓았다는 고변을 터뜨렸다. 사도세자를 향한 영조의 불신을 극에 달했다. 영문도 모르는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자결을 명했지만 완강히 버티자 폐세자 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그 후 8일 만에 사도세자는 유명을 달리했다.

 

4. 신하는 믿지 않았지만 백성은 사랑했다

 

    사생활은 편집증적 애정과 증오로 오락가락했으며 사도세자까지 뒤주에 가뒀지만 영조가 성군이 된 것은 변함없는 애민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영조가 탕평을 추구한 것도 만백성이 행복했던 요순시대를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형(私刑)을 금지했고 세금을 감면했다. 사형이란 양반이 공적 절차 없이 백성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주리를 트는 압슬형, 불로 지지는 낙형,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자자 등을 말한다. 또한,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이 억울할 때 왕에게 직접 호소하게 했다. 다음 균역법을 실시해서 양민이 국방의무를 대신해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권문세가의 토지장부에서 누락된 토지를 찾아 과세했다.

 

    영조는 노론에 맞서 네 당파를 고루 등용해 제어했지만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 조선 왕실 초유의 비극을 가슴에 안고, 손자 정조를 두고 여든셋에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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