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의 통치 기간은 인조 26년과 효종 10년을 합쳐 36년이다. 세계사적으로는 대항해 시대로, 산업혁명의 물적 토대가 축적되고 있었다. 소현세자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도층인 사대부와 왕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백성의 반청 정서를 강화하는 북벌만 외쳤다. 실현 불가능한 구호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력 집결에 마이너스가 될 뿐이다.
리더는 개인의 입지 확보를 위한 선동성 구호가 아니라 공동 번영에 맞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그 비전은 '예측과 측정'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감을 얻고 리더 자신도 당당한 자신감을 갖는다.
1. 서인들 세상이 열리다.
인조는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장남으로 능양군으로 불렸다. 능양군과 서인은 세 가지 이유를 대며 반정을 일으켰다.
첫째, 폐모살제.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이다.
둘째, 재조지은의 망각. 왜란 때 도운 명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후금과 내통했다는 것이다.
셋째, 과도한 토목 공사. 연이은 궁궐 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명분으로 일으킨 반정이 의외로 쉽게 성공한다. 광해군 말년 측근의 내분 때문이었다.
서인들 세상이 왔다. 반정 공신들이 광해군 권신들의 저택과 전답을 백성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들이 차지했다. 광해군은 양반을 견제했으나 인조는 양반 대신 백성을 눌렀다. 이후 조선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삼전도의 치욕이 발생한다.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 갔다가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제주도로 이송되어 폐위된 지 19년 만에 생을 마친다.
반정 공신들의 잔치가 무르익어 가던 1624년 1월 24일, 잔치에 재를 뿌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2등 공신으로 책봉된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자신보다 공이 적은 김류가 1등 공신이 된 데 불만을 품은 것이다. 이괄의 반란군 1만 2,000여 명이 영변에서부터 한양 궁궐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반군은 2월 10일 한양에 무혈입성 후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 후 관군이 길마재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데다 모래 섞인 강풍까지 반란군 쪽으로 부는 바람에 반란군은 대패했다. 이렇게 이괄의 3일 천하는 끝났다.
2. 외교 분쟁이 전쟁으로
인조 치세 동안 두 번 전쟁이 일어났다. 광해의 중립 외교를 포기하고 명나라만을 고집하여 일어난 즉위 5년째의 정묘호란과 10년째의 병자호란이다.
후금은 인조 14년(1636)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정묘호란 이전에 이미 만주를 통일하여 중원 장악의 발판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종은 후금과의 사신 왕래를 금지하는 대신 청나라의 배후를 노리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적극 후원했다.
인조 5년(1627) 1월 8일, 홍타이지(청 태종)의 명을 받은 대패륵 아민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인조는 모문룡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모문룡은 조선을 돕기는 커녕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이에 인종은 강화도로 피신한다. 후금군은 가는 곳마다 불시에 의병의 습격을 받으며, 혹 후방에서 명나라가 기습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인조에게 강화 조건을 제시하였다. 최명길이 앞장서 조선이 명나라와 유지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3. 편향된 정세 파악이 낳은 삼전도의 비극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이 인조를 만나 청 태종의 뜻을 전하자 대신들이 격분했다. 이에 인조는 결전 조서까지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청 태종은 압록강이 얼기만 기다렸다가 인조 14년(1636) 12월 북풍으로 사방이 얼어붙자 대군을 일으켰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넌 지 14일 만에 개경에 도착했다. 그제야 인종이 강화도로 도피 길을 나섰지만, 벌써 청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인조는 하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성안에 고립된 인조는 식량은 물론 마실 물까지 떨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47일 만인 1월 30일에 항복한다.
청 태종이 있는 단상 앞에서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법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를 했다. 이것이 삼전도의 치욕이다.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가 조선과 주변 여건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으로만 바라본 대가였다.
4. 효종의 북벌정책, 웅지인가 통치 수단인가
장자 계승이 중요한 조선에서 멀쩡했던 소현세자와 원자까지 급사하고 그 자리를 효종이 차지했다. 이 상황에서 중화주의를 신봉하는 사대부의 입지를 줄이고, 왕권을 뒷받침할 돌파구로 중국을 점령한 아시아 최강의 청나라를 공격하겠다고 나왔다. 조정에서 친청 세력이 사라지자 효종은 어영청을 북벌의 선봉 부대로 삼고, 금군을 기병부대로 개편했다.
효종의 무치(武治)에 의도치 않게 네델란드인 하멜이 도움을 주었다. 하멜 일행 36명이 탄 네델란드 무역선이 효종 4년(1653) 8월 제주도 부근에 표류한다. 다음 해 5월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했다. 하멜은 봄가을이면 3개월씩 군대를 동원한 북벌 작전 훈련과 세 차례 사격 연습에 참여했다. 그 뒤 현종 7년(1666) 9월 본국으로 탈출한다.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가 충돌한다. 효종은 청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바로 파병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효종은 북벌 의지를 의심받았다. 만일 효종이 러시아와 청나라 간 분열책을 썼다면 동북아의 지형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을 천명한 왕답지 않게, 청의 요청대로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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