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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경종(재위 1720~1724)

by y2ryang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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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어진

    경종은 몸과 마음이 다 약했다. 강한 숙종은 당쟁을 이용했으나 약한 경종은 재위 4년 내내 당쟁에 이용당했다.

    중종반정 이후 추락한 왕권을 숙종이 철권통치로 회복해 놓았으나, 거꾸로 경종은 당쟁에 눌려 지도력을 상실했다. 

    리더의 가장 큰 죄는 무엇보다도 지도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거듭된 대리청청, 그리고 게장과 생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이 된 1720년, 조정은 장희빈을 죽인 노론이 대세였다. 이들은 경종을 임금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경종을 쫓아내는 데 힘을 쏟았다. 

 

    소론이 정국 돌파용으로 궁리해 낸 것이 '장희빈의 신원'이었다. 경종 즉위년에 소론의 조중우가 상소를 올렸다. 장희빈의 한을 풀어주자는 것으로, 그렇게만 되면 장희빈 제거에 앞장섰던 노론이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론도 이에 총력으로 대응하였으며,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그러한 소론을 비난하였고, 뒤이어 곳곳에서 탄핵이 빗발쳐 조중우는 끝내 옥중에서 맞아 죽었다.

    기선을 잡은 노론은 경종보다 여섯 살 아래인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추대하기로 한다. 조선왕조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이방원도 형 정종의 양자 형식으로 태종이 되었다. 그런데 이복동생을 세자라는 미명으로 후계로 세우라는 것이었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등 노론 대신들이 한밤중에 경종을 찾아가 밤을 새워가며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 허락을 받아냈다. 경종이 집권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1721년 8월의 일이었다.

    당연히 소론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두 달 뒤 노론은 다시 조성복을 앞세워 연잉군 대리청정을 주장했다. 서른세 살 경종은 정사에서 손을 떼고 스물일곱 살 세제에게 정사를 맡기라는 요구였다. 이런 황당한 상소마저도 경종은 받아들였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따라 대리청정과 친정체제가 수차례 반복 되었다. 

 

    1722년 4월, '목호룡의 고변'이 정국을 강타한다. 남인 출신 목호룡이 '노론이 삼급수로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대급수는 노론이 환관, 궁녀와 결탁해 칼로 살해하는 것이고, 소급수는 음식에 독을 타서 죽이는 것이며, 평지수는 모함으로 경종을 폐출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고변으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은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173명이 화를 입고, 목호룡은 동지중추부사 자리를 맡는다. 목호룡의 고변 내용에 연잉군도 연루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인원왕후의 도움과 경종의 배려로 연잉군은 겨우 살아났다. 

 

    경종은 이복동생 연잉군이 자신의 정적인데도 혈육이라며 아꼈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욕심이 없고 선하기만 했다. 왕이 된 후에도 수령들이 임지로 떠날 때면 격려했고, 종친들에게도 각별했으며, 대신들의 상사(喪事)에 곡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잔병치레가 잦았던 경종은 비를 두 명 두었지만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 노회한 노론이 관리하기에 딱 좋은 왕이었다.

 

    1724년 대비와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5일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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