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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정조(재위 1776~1800)

by y2ryang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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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어진

 

    "절망으로 단련되었고 희망으로 움직였다"

    미완의 혁신 군주 정조의 일생을 압축한 말이다. 경영인이나 정치인이 서로 본받겠다고 하는 인문이 세종이라면, 종조는 인문학자들의 찬사를 받는 왕이다.

    정조는 16세기 말 선조 이후 200년 이상 깊어진 붕당정치의 한복판에서 등극했다. 정조와 세종이 둘 다 영민하고 진보적이며 결단력이 강했으면서도, 세종이 소통을 중시한 리더였다면 정조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일을 풀어갔다.

   정조는 주자를 신봉하면서도 실학을 수용하고자 했고, 금난전권의 특혜를 폐지하는 등 상업을 활성화했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래서 화성 신도성이 완성되고, 군민 공치체제가 정책했다면 조선은 청나라는 물론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나라로 웅비했을 것이다.

 

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동궁 시절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정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시절 나는 엎드려 하라는 대로만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조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칩거해 독서하는 것뿐이었다. 그 덕에 정조는 세종에 버금가는 박식한 군주가 되었다.   

 

    즉위 후 경복궁 빈전 밖에서 처음 대신들을 마주한 정조가 선언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동궁 시절부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부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정조는 왕이 되자 바로 금기를 깨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2. 거듭되는 암살 시도

 

    정조는 즉위한 해 5월 28일, 답안지가 권문세가들에게 빈번히 누출되던 과거제도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인재 등용 방식의 변혁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을 설립하고 여기서 왕이 대과를 직접 관장하는 정도로 개선했다. 그 덕분에 다산 정약용 등을 선발할 수 있었다.

 

    정조가 수구 세력의 기반을 없애려 하자 취임 초부터 3대 반역 사건이 발생한다. 노론 벽파가 정조를 암살하려고 꾸민 일이었다. 

    홍상범이 악감정을 품고, 천민 출신으로 힘이 장사인 전흥문과 왕실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했다. 이를 강용휘의 딸 궁녀 강월혜가 대궐의 가장 큰 어른인 정순왕후의 상궁 고수애에게 귀띔해 주었다.

    1777년 7월 28일 깊은 밤, 정조가 왕의 숙소 존현각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자객들이 월담했으나 내시와 군사들이 몰려와 암살에 실패했다. 

    같은 해 8월 11일 밤, 자객들이 재차 대궐 담을 넘다가 잡히게 된다. 

    이 모든 일의 배후 인물이 노론으로 드러나자 노론 전체가 전전긍긍했다.

    이때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이 주도한 세 번째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국청에 잡혀온 홍상길이 엉뚱하게 열여섯 살의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실토했다. 은전군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정조가 지극히 아끼는 동생이었다. 노론은 이것을 대반전의 기회로 삼아 은전군 사형 주청으로 정국을 몰아갔다. 정조는 은전군의 역모에 관한 증거가 없어 반대했으나 100회가 넘는 주청에 견디다 못한 정조는 은전군에게 자진을 명했다.

 

3. 왕의 행차 앞에 징과 꽹과리를 들고 선 백성들

 

    정조는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 곳이며, 송시열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주장한 지 120년째 되던 해였다. 부국강병으로 북벌의 숙원을 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정치적 상징성을 띤 행보화 함께 구체적으로 백성과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었는데 바로 '격쟁'이다. 왕이 행차할 때 억울한 백성이 꽹과리나 징을 치면 왕이 멈춰서 사연을 듣는 것이다. 25년 동안 정조가 격쟁 등으로 해결한 민원만 5,000여 건이다.

 

4. 서얼허통책과 시파의 중용

 

    즉위 직후 창덕궁 후원에 급진 개혁 정책 연구와 자문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하고, 다음 해 서얼허통 정택을 공표했다. 신분사회의 일대 변혁을 예고하는 파격이며, 성인 양반 남성만을 인재로 한정하던 차별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 출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을 임명하고, 선천내금위도 중인과 서얼로 채웠다.

    정조의 불만 세력인 노론 벽파는 서얼허통 정책을 '가정 내부 일'이라며 묵살했다. 

    이들을 정조가 서서히 밀어내고 남인이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과 북학파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그리고 노론 일부만 중용했다. 이들은 시파를 중심으로 뭉쳤다.

 

5. 인적 자원의 보고, 노비를 해방하라

 

    조선의 노비는 파산한 양민이거나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조 때로 내려올수록 노비는 급증하고 양인은 줄어들었다. 그만큼 양인은 납세, 군역, 노역의 짐을 더 감당해야 했다.

    이에 정조는 노비제도 혁파를 구상하며 권문세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늘리며, 인적자원을 확보하려 했다.

    정조는 노비를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하던 중 승하했고, 대행히 순조가 즉위한 해에 공노비 해방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고종 때에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다.

 

6. 금난전권 철폐로 노론 벽파의 자금줄을 조이다

 

    채제공이 정조 14년(1790)에 좌의정이 된 후, 3년간 영의정과 우의정은 공석이었다. 채제공의 독상체제로 정국을 운영했다. 정조에게 직책이란 반드시 채워야 할 자리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채제공은 정조의 기대대로 1791년 신해통공을 주도했다. 그 내용은 금난전권을 철폐하여 도매장의 매점매석 행위를 엄금한다는 것이었다. 

    종로를 따라 가게가 형성되었고, 이 중 규모가 커진 비단, 명주, 무명, 모시, 종이, 생선을 취급하는 거상을 육의전이라 했다. 이들이 권세가들과 결탁해 궁궐의 물품을 독점 조달하도니, 채소나 소금, 옹기그릇 같은 생필품도 허가받은 가게에서만 팔게 하고 난전을  금했다. 다른 상품의 독점권과 영업 허가권까지 확보한 것이다. 이건이 금난전권이다.

    정조는 빗발치는 상소에 흔들리지 않고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철폐했다. 이로써 난전이 가능해짐으로써 누구나 자유롭게 상행위를 시작하면서 물가는 안정되고 화폐경제도 발전했다.

 

7. 천도로 제2의 개국을

 

    정조는 80년 이상 집권한 노론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궁리 끝에 천도를 구상했다. 당시의 한양이야말로 노론의 철옹성이었다. 수원 화성을 염두에 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에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용복면의 화산으로 옮겼고 묘 이름을 현릉원이라 하였다.

    천도를 염두에 두고 1794년에 화성(수원시)에 성곽을 건설하는 등 신도시 건설을 시작했으며 1년 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다.

    수원성은 정약용과 유원형이 설계하고 축성했다. 북문의 이름은 장안문, 남문은 팔달문이라 했다.

    수원성은 1796년에 완공했다. 정조는 갑자년(1804)이 되면 열다섯이 되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모친 혜경궁 홍씨와 신도시에 거주할 뜻을 품었다. 

 

    정조 23년(1799), 지난 30년간 변함없이 정조 곁을 지켜준 개혁의 우군 채제공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후 남인들도 지리멸렬 해졌다.

    이에 정조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세자의 후견인을 선정했다. 노론 중 시파 입장을 취했던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의 정비로 내정한 것이다.

    그 다음 5월 30일에 청천벽력 같은 오회연교를 내린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가 옳다. 그럼에도 선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 그러나 계속 거짓말하고 나와 맞선다면 노론을 숙청하고 남인을 중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조의 최후통첩에 노론은 심환지를 중심으로 대책 마련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 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정조가 신하를 접견하던 중에 쓰러졌다. 종기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순왕후가 상태를 보겠다며 달려왔다. 대비가 오니 법도상 어의와 모든 신하가 물러가야 했다.

    그 상태에서 곡소리가 났다. 이때 정조는 마흔아홉 살로, 공식적인 사인은 울화증과 종기였지만 독살설이 떠돌았다.

 

    정조가 죽자 정조가 추구하던 정책이 정순왕후파에 의해 물거품이 되면서 조선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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