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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예종(재위 1468~1469)

by y2ryang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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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어진

 

    태종이 세종을 알아본 것처럼 세조도 성군을 후계자로 세우길 원해 즉위 후 장남 숭을 의경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2년 후 의경세자는 요절했고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그가 곧 예종이다. 즉위할 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지만 모후 정희왕후와 세조의 공신인 원로 중신들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대비가 되어 왕과 사대부의 나라에서 최초로 수렴청정을 펼치며 여왕 이상의 지위를 누렸다.

 

1. 왕을 보호할 신진세력을 제거하다

 

    세조가 성군이 되길 고대한 의경세자는 열아홉 살에 요절했다.  의경세자는 특별했다. 예의가 바르며 학문을 좋아했고 사치를 멀리하고 질박하여 민심을 샀다. 세조가 태종을 닮았다면 의경세자는 세종의 판박이였다. 세조는 이런 아들을 잃었던 것이다. 

    그 충격 때문일까. 세조가 뒤늦게 공신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마침 함길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다. 예종 즉위 1년 전인 세조 13년(1467) 이었다. 

   이 난을 남이 장군과 구성군이 진압했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며 구성군은 세종의 친조카다. 세조는 이들을 적개공신으로 삼은 후 기존 공신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기 전에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한명회, 신숙주가 공모하여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세조는 이런 이이제이 전략에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를 이용해 한명회와 신숙주를 추국하며 혼쭐을 내고 석방했다.

 

    세조는 공신 집단과 권력을 분점하는 원상제도를 만들어 왕이 원상들과 상의하여 국정을 운영하게 했다.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원상의 실세는 한명회였다. 원상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누구라도 앞길이 위험해졌다. 즉, 예종의 왕권은 미약 하기 그지없었다. 훈구파는 조선 중기에 사림파의 도전을 받을 때까지 정치 경제를 독식한다.

 

    예종의 즉위 당시 원상 대신들과 맞설 세력은 세조가 말년에 형성해 놓은 적개공신들이었다. 특히 남이 장군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상 이상이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조선 최대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원상들은 세조가 죽고나자 이러한 신진세력을 방치할 수 없다고 보고 제거 수순에 들어갔다. 

    유약한 예종은 강인한 남이를 질투하고 있었고 지중추부사 한계희의 주청에 두말없이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또한 한명회는 남이를 무고함으로써 남이와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랑 등 30여 명을 사거리에서 거열형을 집행하였다. 

 

2. 신진세력을 내친 후 적폐청산을 시도했더니

 

    예종은 남이의 옥사가 끝나고 유자광, 한명회와 신숙주 등을 익대공신으로 책봉했다. 그후 구공신을 손보겠다며 대납권과 분경을 폐지하고, 이를 어기면 능지처참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 권리들은 세조가 공신들에게 부여한 최고의 특권들이었다. 예종이 당대 최고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하자 백성들이 환호했다. 신숙주, 우의정 김질, 병조판서 박중선, 이조판서 성임 등의 집에서 분경자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이들을 국문하는 자리에서 한명회까지 거론되자 공신집단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예종은 즉위 1년째 되던 해 4월에는 공신들의 면책특권까지 손을 댔다. 역모만 아니면 어떠한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았던 공신들은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웠다. 

 

    왕과 공신들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중 예종은 스무 살의 나이로 병사한다. 실록에는 예종이 족질을 앓았다고 나온다. 

    예종이 죽던 바로 그날, 원상 8명이 일찍이 한자리에 모였다. 예종의 서거 급보를 듣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일사천리로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을 후계로 정하였다. 

 

    예종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적폐청산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첫째,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남이가 부왕 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동안 유약한 예종은 세조가 두려워 세조 생전에 술 한 잔 입에 대지 못할 정

             도로 조심했다. 이런 개인적인 질투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신공신을 구공신과 같이 왕권강화의 걸림돌로 보고, 세력이 적은 신공신을 먼저 해체한 다음 뿌리 깊은 구공신을

             해체하려 한 것이다. 즉, 정작 큰 암초인 구공신 대신 자신의 우군이 될 세력을 먼저 제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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