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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성종(재위 1469~1494)

by y2ryang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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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역사상 전대 왕이 승하한 다음 날 바로 왕이 된 유일한 왕이 성종이다. 나이 열세 살에 즉위하였고 정희왕후는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라 7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성종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정희왕후는 기꺼이 수렴청정에서 물러났으며 권력을 넘겨받은 성종은 기다렸다는 듯 탁월한 통치술을 발휘하게 된다.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실 담합으로 즉위하다

 

    예종이 승하하자 재상들은 일제히 정희왕후에게 달려갔고, 정희왕후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이미 한명회 등의 원상들과 은밀히 논의한 결과였다. 적통원자인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왕이 되리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한편, 한명회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예종과 성종 두 왕의 장인이 되었다. 

 

    인수대비는 어린 아들 성종을 돕기 위해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힘을 합친다. 이전부터 두 사람은 한명회와 정치적 삼각관계를 형성하여 정국의 밑그림을 그려왔다. 성종 즉위 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종친들이 정통성 시비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제안군과 월산군을 먼저 대군으로 높여 다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종친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종친 세력의 중심에 세종의 친조카인 영의정 구성군이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구성군은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백성의 신망도 높았고, 종친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은 인물이다. 그만큼 성종은 물론 정희왕후와 한명회에게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대간들은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의중을 읽고 구성군을 탄핵하기 시작했으며 구성군은 끝내 1470년에 유배를 가야만 했다. 

 

    정희왕후는 수렴청정 7년 동안 성종을 위한 기반을 조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학 정치의 기풍을 만든 것이다. 불교 4대 금지, 즉 도성 내 염불 금지, 사대부 부녀자가 출가 금지, 도성 내 승려 출입 금지, 불교의 화장 풍습 금지 정책을 폈다. 

    구성군이 귀양간 후 정희왕후는 세조가 허용했던 종친의 정치 참여와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했다. 한명회 등 훈구 세력도 종친이 약화되는 만큼 신권이 강화되었다.

 

    정사가 신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도 성종은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은 바로 장인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 세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2. 정중동에 능했다.

 

    성종은 정희왕후 섭정 7년 동안 공신들이 쥐고 흔들어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그 대신 공신들의 행태와 각기 성향을 파악해 두었으며, 백성들을 위한 민심 유화 정책에 집중했다.

 

    즉위 직후 민간에 대한 관청의 감시를 줄이기 위해 호패법을 폐지했고, 고리대금업을 관장하는 내수사 장리소 560개를 235개만 남겨두고 없앴다. 유생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삼강행실'을 가르치게 했다.

    지방별 특색에 맞게 산업을 장려했다. 전라도에 뽕나무, 황해도에 목화를 심도록 하는 식이었다. 

    농민의 땀을 왕실도 알아야 한다며 궁궐 안에 농지를 만들어 친히 경작하였으며, 궁내 여자들도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도록 했다. 

    성종은 시빗거리는 없애고, 신하의 잘못은 용서해 주되 재발하지 않도록 하며 충성을 다하도록 했다. 백성과 신하들이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은 권력장악에 무심한 듯 시간만 나면 궐내에서 밭을 일구고 양잠을 했다. 이를 지켜본 훈구대신들은 성종을 희대의 명군이라 칭송하며 크게 안심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훈구대신들의 권력 농단을 모르는 척 백성과 정서적 교감을 강화하며 정중동의 시기를 보냈다. 

 

3.  정몽주가 뿌리인 사림을 중앙 무대로

 

    성종은 훈구 세력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심기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또한 정치보다 풍류에 더 관심을 쏟는 것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성종은 즉위 8년(1477) 친정을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먼저 조정 내 세력 균점을 추구했는데, 원상의 조정 서무 결재권을 회수하고 김종직 등 사림을 등용해 권신을 견제할 세력으로 키웠다. 기본적으로 사림은 고려 말 역성혁명을 일으킨 강경 사대부와 갈라선 이색, 정몽주, 길재 등 온건 사대부가 그 뿌리이다.

 

4. 성종의 핵심 인물, 김종직

 

    성종은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을 공신 견제의 핵심 인물로 보고 승정원의 도승지 벼슬을 주었다.

    김종직이 성종의 통치 이상인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강조한 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널리 구한다.

    둘째, 조선 팔도가 시골까지 유학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이 근왕 세력이 되면서 왕권이 한층 안정되었다. 당시 공신 등이 포진한 훈구파는 성균관 유생이나 집현전 학사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정치 현실에 밝았고 문장을 중시했다. 이에 비해 사림은 낙향한 학자들 중심의 재야 인물들과 그 제자들로 시와 성리학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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