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결과중심적 리더였다. 사회적 가치와 자기 욕망이 충돌할 때면 사회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욕망 추구를 합리화한다. 그 결과 과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승리의 쟁취에 전념한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으나 세종의 아들 세조는 가족을 제거하고 왕이 된 패륜의 군주였다.
태종과 세조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장자가 아니라서 왕위 계승에서 밀렸지만 개인의 지략과 집념으로 왕이 되었다. 두 왕 모두 권력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1. 진흙에서 찾은 보배, 한명회
태종이 즉위과정에서 형제를 없앴다면, 세조는 동생과 조카를 없앴다. 이런 일을 수행하려면 엄청난 지략을 갖춘 책사가 필요한데, 태종에게는 하륜이,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었다.
어린 단종을 보필할 왕족 대표로 수양대군, 금성대군이 선정되었다. 단종 즉위년인 1452년 8월 10일, 수양은 신숙주에게 자신의 야망을 내비쳤고 신숙주는 포섭되었다. 야심가 수양을 견제하고자 고명대신들은 의정부 권한을 강화하는 황표정사를 고안하였고, 안평대군과 연대하였다. 정국이 이렇게 흐르자 표면상 수양이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세종의 사람이었던 집현전 교리 권람은 한명회를 당대의 기재라며 수양에게 장자방으로 삼으라고 권했다.권람과 한명회는 지위, 재산 등을 묻지 않는 망형우(忘形友) 관계였다. 한명회는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에 거듭 떨어진 낙방거사로, 겨우 음서로 경덕궁 문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수양은 이런 한명회를 거사 총책임을 맡겼고, 한명회는 필요한 자금과 병장기까지 조달하기 시작했다.
2. 살생부와 천지개벽
1453년 3월, 명나라로 떠났던 수양이 7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 한명회는 무인 양정, 홍달손, 유수 등 30여 명을 포섭해 두었다. 귀국 후 수양은 왕권 강화의 명분으로 단종에게 황표정사를 폐지하도록 하였고, 순진한 단종은 수양 숙부야말로 충신이라며 그에게 더욱 의지하였다. 고명대신들의 인사권과 정책 결정권이 단종에게 넘어갔다.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오른 자들 중 일부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영의정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등이 그들이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한 고명대신의 잔존 세력들은 결국 수양에게 진압되었다. 수양이 명나라에 다녀온 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그 후 수양은 영의정부사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에 올랐다. 백관에 대한 통솔권과 병마권을 장악한 것이다.
3. 대세 장악 후 이미지 고양과 즉위
본래 조선 왕실의 종친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이 법을 수양이 깨트리고 힘 있는 벼슬은 모두 독차지 하였다.
조정을 장악한 수양은 자기 미화 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집현전에 명을 내려 자신을 주나라 주공에 비유하며 찬양하는 교서를 반포하세 하였으며, 큰아버지 양녕대군을 대동하고 단종을 찾아가 왕비를 맞도록 하였다. 단종은 부친 문왕의 3년상이 지나지 않았다며 거절했지만 수양의 강요에 따라야만 했다. 수양은 자신이 어린 왕을 생각하는 왕실의 어른이라는 것과 단종이 상중에 혼인한 불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었다.
수양은 내시 엄자치, 금성대군 등 단종의 주변 인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1년 9개월째인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내시 전균을 불러 수양에게 양위한다는 뜻을 밝혔다. 문부백관 200여 명이 경회루 대청에 도열한 가운데 수양이 엎드려 울먹이며 거부의 뜻을 밝혔으나 끝내 단종으로 부터 옥새를 건네 받고, 근정전으로 가서 조선의 7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4. 사육신과 생육신
세조는 조부 태종을 많이 닮았다. 권력구도에 장애가 되는 인물은 과감히 제거했다.
차이점도 있다. 태종은 거시적 관점에서 최측근도 버린 반면, 세조는 측근 중심으로 정치를 하였다. 수양은 한명회, 권람 등의 모사 그룹과 홍달손, 양정 등의 무사 그룹을 거느렸다. 이 두 세력이 수양대군 좌우에 포진하여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수양의 득세 이후에도 여전히 민심은 상왕에게 있었고, 절개를 목숨처럼 여기는 충신도 있었다. 충신들이 모여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였다.
세조 2년(1456) 창덕궁 광연전에서 명나라 고명칙사의 송별회를 앞둔 때였다. 세조의 경호 책임자는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과 유응부였다. 집현전 학자 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질 등도 성승과 유응부와 함께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눈치빠른 한명회가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성삼문이 유응부를 만나 모사가 누설된 것 같으니 거사를 미루자고 하여 거사는 발생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김질이 이 사실을 장인 정창손에게 털어놓았고 정창손은 바로 세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성삼문과 관련자 전원이 압송 되어 세조에게 한 명씩 친국당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친국당한 성삼문은 세조를 나리라고 호칭하며 세조를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성삼문의 인품과 학문을 아꼈던 세조는 과거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읊었던 하여가를 읽어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성삼문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내비치고 죽음을 맞았다. 성삼문과 함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도 처형당해 '사육신'이 되었다.
역모사건이 마무리 된 후, 세조는 42명의 공신을 책록했다. 그중 김시습, 조려, 원호,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은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다며 세조의 공신 책록을 거부했다. 이들 '생육신'은 낭인처럼 평생을 절간이나 움막을 전전하며 살았다.
5. 이시애에게 역모로 몰린 한명회와 신숙주
단종의 충신들까지 제거하였음에도 단종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이 좀처럼 식지 않자 세조는 1457년 6월,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낸다. 그해 9월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을 비방한 죄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갔던 금성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순흥에서 소백산만 넘으면 영월이었다. 집현전 출신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의 강등 소식을 듣고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도모한 것이다.
이를 짐작했던 세조는 금성대군과 그 관련자들을 모두 일망타진하였다. 대신들은 노산군을 없애야 세상이 편해진다고 주장하였고, 세조는 마지못해 신하들의 청을 들어주는 척을 하였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을 찾아가 사약을 전달했고, 단종은 열일곱 해 삶을 그렇게 마감했다. 백성들은 세조가 조카와 형을 죽인 패륜 군주라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세조는 민심 통제와 민심 부리 정책을 동시에 폈다.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으로 통제하고, 중앙 출신 우대정책을 펴 지방 출신들과 차별했다. 이에 함길도 호족 이시애가 반감을 품고 세조 측근을 분열하는 상소를 올렸다. 바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강효문과 결탁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음모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아무리 측근이라도 쉽게 믿지 못했으며, 졸지에 역모로 몰린 한명회와 신숙주는 큰 고초를 겪는다.
세조 측근의 이간책에 성공한 이시애는 세조 13년(1467),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남이 장군의 3만 대군에 진압되었다. 이 반란 이후에 한명회와 신숙주의 혐의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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