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여러 가지이다. 자신감, 동기부여 능력, 관계 구축력, 스트레스 회복력, 조직 감각력, 통찰적 지향성, 추진력, 판단력 등이 요구된다.
"그대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왕을 만날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어떤 왕보다 그대들을 더 사랑하는 왕으로 남고 싶소"
리더는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어야 하며, 위로받기보다 구성원의 고뇌를 위로해 주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
문종과 단종이 왕으로서 중심만 잡았어도 수양의 찬탈은 없었을 것이고, 연산 같은 폭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 문종: 백면서생 문종의 애잔한 애정사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선대왕이 부족했다면 후대왕이 조금만 잘해도 인정받지만, 선대왕이 세종 같이 출중하다면 후대왕은 그늘에 묻히기 마련이다. 문종이 그러했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므로 정통성에는 하자가 전혀 없었으며, 8세 이후 28년간 왕세자 역할을 하였다. 그 중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말년에 자주 병상에 누운 세종이 왕세자인 문종에게 정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세종은 영응대군 사저에서 승하하였고 1450년 2월 22일, 문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렇게 세종의 그늘이 걷히자 그때부터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이 뛰쳐나와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종은 그들을 놓아두었다. 그만큼 우애가 깊었던 것이었다.
문종은 성리학, 천문, 역상 등을 파고들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해박했다. 인품도 백성과 신하가 모두 존경할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왕의 역할을 하기에는 연약했다. 그런데도 무리하면서까지 군사 훈련을 감독했으며, 활을 쏘면 백발백중일 만큼 무예도 가다듬었다. 문종에게 아쉬웠던 것은 건강과 가정이었다.
문종이 세자 시절 혼례를 올린 휘빈 김씨는 시기가 많아 문종이 궁녀를 만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휘빈 김씨가 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주술을 부렸다가 발각되어 세종이 직접 국문하였고 그 결과 휘빈 김씨는 쫓겨났다.
이어 세자빈으로 들어온 순빈 봉씨는 자유분방하였다. 게다가 순빈 봉씨는 동성애자였으며 여종 소쌍과 동성애 관계를 맺다가 세종에게 들켜 본가로 쫓겨나야 했다.
세 번째가 현덕왕후 권씨로, 훗날 단종이 되는 홍위를 낳은 지 3일 만에 별세했다.
이처럼 문종의 가정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세종이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자 문종은 섭정을 하였고, 이때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설치기 시작한다. 안평은 감성적이며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수양은 직선적이며 무인 기질이 넘쳤다. 세종을 닮은 문종은 이런 동생들을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세종은 마음이 편치 못했으며, 특히 수양의 야심과 냉혹성이 걱정되었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세종은 문종에게 세손을 보필할 신하로 김종서와 성삼문을 지명했다. 하지만 문종이 집권 2년 3개월 만에 요절하는 바람에 어린 단종은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2. 단종: 단종의 고명대신과 수양대군의 기 싸움
단종은 열두 살 나이로 즉위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되면 대왕대비나 대비가 일정 기간 수렴청정을 한다. 그러나 단종에게는 그렇게 해줄 왕실의 어른이 없었다. 그저 야망을 불태우는 숙부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임종 직전 문종도 이를 걱정해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 삼정승을 불러 단종을 지켜달라는 유지를 남겼다. 이들 대신들은 단종 즉위를 앞두고 즉위 교서에 분경금지 조항을 넣기로 한다. 정종 때 실시했으나 유야무야 되었고, 수양을 비롯한 대군들의 야욕을 막기 위하나 방편으로 다시 거론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수양대군이 영의정 황보인에게 따지자 겁을 먹은 황보인은 벼슬아치들의 분경은 계속 금지시키면서도 대군들은 분경금지에서 해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의 위상만 높아진 것이다.
수양대군 주위에는 무인들이, 안평대군 주위에는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안평대군은 자신보다 세력이 강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고명대신들과 연대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이 발생하였다. 수양대군이 고명대신들을 참살하고 안평대군을 유폐한 사건이다. 그리고 영의정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였다.
단종은 수양이 자신의 측근들을 하나씩 제거하자 압박을 견디지 못해 열다섯 살에 왕위를 내놓았다.
이는 사실 문종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문종 때 세종과 비교해 왕권이 위축된 데다가, 수양과 안평의 월권이 빈발했었고 언관들의 탄핵이 있었음에도 우애가 깊은 문종이 방치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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