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태조가 문을 열고, 태종이 기반을 닦았으며, 세종 때 가장 융성했다. 그 풍요로운 기세가 세조를 지나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된 탓인지, 성종 말기에 퇴폐풍조가 조장되었다. 왕이 여색을 밝히며 비빈들끼리 갈등의 골이 깊어져 연산군 때 대학살의 빌미를 남겼다.
최악의 리더의 공통점은 첫째, 조직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며 둘째, 소통 형식이 하향식이고 셋째,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적다. 연산군처럼 왕이 왕관의 가치를 귀히 여기지 않고 왕관을 희롱하면, 신하들도 공적 업무는 대충 하고 사적 연줄 잡기에 급급해지며 민심은 떠난다. 수없는 무도한 짓으로 왕관을 희롱한 연산군은 폐위되어 교동으로 안치되었다.
1. 외로운 왕자
연산군 이륭이 태어나자 성종은 경사라며 대사령을 내려만백성과 함께 즐거워했고, 종친과 대신들도 크게 경하하였다, 이렇게 만인의 축복 속에 태어난 연산군은 어쩌다가 희대의 폭군이 외었을까?
본래 융은 과잉 행동 성격이었으며 10년 이상을 가르쳐도 문리를 깨닫지 못했다. 성종도 융의 표독스러운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성종 14년(1483) 여덟 살 융을 세자로 책봉했다. 융은 폐비의 아들이 세자가 되면 후환이 클 것이라 주장한 인수대비와 성종을 싫어했다. 융이 세자가 된 지 5년 후 정현왕후가 진성대군을 낳았으며, 인수대비는 진성만을 금쪽같이 여기며 정성을 쏟는다. 이 모든 것이 융에게 응어리로 남는다.
2. 사림파를 숙청한 무오사화
연산군은 즉위 직후 성종 말기의 퇴폐풍조를 일신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낭비 풍조를 막기 위해 사치금제절목을 만들었다. 또한 팔도에 암행어사를 보내 민심을 살피고 지방 수령들의 부패를 징계했다. 이외에도 연산군은 <국조보감>을 연속 편찬했는데, 세종이 조선의 제왕학 교과서로 삼기 위해 역대 왕들의 어진 행실을 기록하기 시작한 책이다. 연산군은 정권 초기에는 어진 군주가 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풍년과 흉년에 곡가를 조절하는 상평창, 빈민을 구호하는 사창과 진제창을 설치하였다.
성종이 싫었던 연산군은 성종이 기르던 사슴을 잡아먹고 성종의 영정에 화살까지 쏘았다. 이런 기질이 노골화된 것은 즉위 4년 차(1498)에 사림파를 소탕하려던 훈구파 유자광, 노사신, 이극돈 등의 계략에 말려들면서부터다.
김종직이 쓴 <조제의문>을 빌미로 연산군은 김일손, 이목 등을 문초한 끝에 왕의 정통성을 부인한 대역 죄인이라고 선고했다. 무오사화의 시작이었다. 김종직의 시신을 부관참시하고, 사림파 선비 수십 명을 능지처참 했다. 더 많은 사림을 불고지죄로 몰아 관노로 만들거나 곤장을 100대씩 쳐서 3,000리 밖으로 귀양 보냈다.
사림 세력을 없앤 훈구파가 조정을 독점하고 외척 중심의 궁중 세력과 의정부와 6조의 벼슬아치 중심의 부중세력으로 분화한다. 권신들도 이런 왕에게 부화뇌동하며 실리 챙기기에 바빴다.
3. 훈구파를 버린 갑자사화
연산군은 문리에 둔했고, 그만큼 정치에도 무지했다. 성종은 이이제이 전략으로 번갈아 양 세력의 손을 들어주며 충성 경쟁을 시켰다. 눈앞의 향락에 빠진 연산군에게는 그런 거시적 안목이 없었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림을 어느 정도 살려두었더라면 이들이 훈구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이 농락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흥청망청 낭비벽에 나라 곳간이 비어갔다. 이때 연산의 기를 살려주는 반전이 일어난다.
훈구파 중 궁중 세력이 공신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독점하고자 모략을 꾸민 것이다. 그 중심에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효령대군의 손녀와 결혼한 임사홍이 있었다.
임사홍과 신수근은 훈구대신들의 주청으로 발생한 '폐비 윤씨' 사건을 거론하였다. 진상을 알게 된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모함한 성종의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직접 철퇴로 내리쳐 목숨을 끊었다. 또한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찾아가 왜 내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항의하며 머리로 받아 기절시켰다.
인수대비의 국상이 끝나고, 연산군의 외조모 신씨가 연산군을 찾아와 피 묻은 적삼을 주며 윤씨의 유언을 전한다. 이에 연산군은 이성을 잃고 당시 사건에 관련된 자들 및 방관자들까지 찾아내 살육하는 나날을 보낸다.
한명회, 정창손을 부관참시하고, 윤필상, 김굉필, 이극균 등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연산군 10년 3월부터 10월까지 있었던 갑자사화다. 담금질, 살점 떼내기,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기, 토막 내기 등 온갖 잔인한 형벌이 자행되었다.
4. 소통을 차단하다
간신들은 연산군에게 전국의 기생을 징발하자고 하자 솔깃해진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흥사를 보낸다. 이때 불러들인 기생을 '흥청'이라 했다. 여기서 '흥청거린다'란 말이 나왔다.
팔도의 기생들도 식상해진 후 간신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기생이 아닌 여염집 여성만 모아보자는 것이다. 그 결과 처녀는 물론 심지어 사대부 처자까지 끌어왔다.
양대 사화 때 겨우 살아남은 문신들이 연산군에게 음탕한 행위를 절제하라고 충언했다. 기분이 상한 연산군은 1504년 홍문관을 먼저 없애고 사간원, 사헌부까지 삼사를 통째로 없애버렸다. 이로써 간언 등 여론과 관련된 통로가 완전리 사라져 버렸다.
연산군은 "한글로 되니 책은 모두 소각하고 가르치지도 사용하지도 말라"라는 언문금지령을 내렸다.
보다 못한 내시 김처선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다. 그는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대 왕을 모셔 왕족들도 조선 최고의 충신이라며 존중하던 인물이었다. 김처선의 충언이 끝나기도 전에 연산군의 화살이 김처선의 목을 뚫었다. 계속되는 김처선의 충언에 연산군은 칼을 뽑아 김처선의 혀와 다리를 잘랐고, 모든 문서와 이름에 처(處) 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5. 모두를 내쫓고, 모두에게 내쫓기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 주변에는 핏줄로 연결된 친인척들만 남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들에게마저 패륜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궁궐 밖 연인들을 탐했다가 다음 사대부의 유부녀를 겁탈하더니, 이제는 종실의 인척까지 유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성종의 친형, 즉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기에 이른다. 박씨는 자결했고, 박씨의 오빠 도총관 박원종이 앙심을 품는다.
이런 박원종에게 지략이 뛰어난 성희안이 찾아와 거사를 제의한다. 성희안은 본래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판서를 지낸 인물이었으나 연산군에 의해 종9품의 말직으로 좌천된 자이다.
박원종과 성희안이 먼저 의기투합 후, 덕망이 높은 이조판서 유순정을 설득했다. 지략의 성희안과 군사력의 박원종, 그리고 덕망의 유순정이 힘을 합쳐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
연산군은 고립을 자초했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제거하고, 갑자사화로 훈구 세력을 제거했다. 게다가 백모까지 겁탈하여 왕실 세력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연산군은 고립무원이 되어가는 자기 처지를 보며 운명을 감지했고,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장녹수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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