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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13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광해군(재위 1608~1623) 임진왜란으로 파탄 난 조선을 일으켜 세우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맞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광해군은 가장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왕이다. 성리학이 신앙이었던 사대부들이 광해의 최대 치적인 실리외교에 반발하였다.     광해도 이성계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라의 방향을 선회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성공했고 광해군은 좌절해야 했다. 1. 부왕의 질투를 견뎌내고 왕이 되다     방계 혈통이라 늘 부담이 컸던  선조는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조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의인왕후에게 태기가 없었다. 후궁이 낳은 14명의 아들 중 제일 위가 임해군, 광해군, 신성군이었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일찍이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다음이 광해군이라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선조(재위 1567~1608) 선조는 재위 기간이 41년으로 영조, 숙종, 고종 다음으로 길다. 즉위 25년에 7년간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다.     선조는 영특했지만 전체를 총괄하는 리더십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의무는 싫어하면서 권리는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선조 치세는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 인재가 많았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서애 유성룡, 그리고 이순신, 권율, 곽재우, 허균 같은 인재를 모아놓고도 국력 신장을 이루지 못했다. 1. 당쟁의 시초가 된 이조전랑 자리     중종의 아들은 모두 9명으로 대윤과 소윤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군만 살아남았다.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가장 총명해 보인 하성군을 선택했다. 조선에서 선조는 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로 처음 왕이 된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인종(재위 1544~1545), 명종(재위 1545~1567)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었으며 자식이 없었고, 다음 장경왕후는 1515년 세자 호(인종)를 낳고 곧 죽었다. 2년 뒤 중종과 혼인한 문정왕후가 1534년에 환(명종)을 낳았다. 두 왕 모두 하늘이 낸 대효라고 백성의 칭송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사적인 효심으로 공적 권위를 훼손했다. 문정왕후에게 매어 마마보이 노릇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 인종     인종은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고, 성질이 고약한 문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문정왕후가 서른다섯 살 늦은 나이에 경원군(명종)을 출산했을 때 세자는 이미 스무 살이었다. 이때부터 세자를 대하는 문정왕후의 눈길이 더욱 싸늘해졌다.      1543년 1월, 세자가 잠들었던 동궁전에 불길이 치솟았다. 윤임이 조사해 보니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중종(재위 1506~1544) 연산군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조선이 중종의 약 40년 치세 동안 조광조를 발판 삼아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신하를 질투한 왕으로서의 중종은 그 그릇이 너무 작고 우유부단하였다. 조광조는 정도전에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인재였다. 그의 죽음이야말로 중종의 한계를 드러낸 최대 실책이었다. 1. 갑자기 씌워진 왕관     연산의 왕관을 벗긴 신하들은 진성대권의 집에 몰려가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박원종 등이 엎드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진성대군은 공신들의 강요에 눌려 받아들여야 했다. 즉, 왕이 되려는 능동적 의지 없이 신하들의 강요에 의해 왕관을 쓰게 된 것이다.        중종은 일곱 살 때 성종이 죽고 나서 이복형 연산군 아래서 온갖 눈치를 보며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연산군(재위 1494~1506) 조선은 태조가 문을 열고, 태종이 기반을 닦았으며, 세종 때 가장 융성했다. 그 풍요로운 기세가 세조를 지나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된 탓인지, 성종 말기에 퇴폐풍조가 조장되었다. 왕이 여색을 밝히며 비빈들끼리 갈등의 골이 깊어져 연산군 때 대학살의 빌미를 남겼다.      최악의 리더의 공통점은 첫째, 조직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며 둘째, 소통 형식이 하향식이고 셋째,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적다. 연산군처럼 왕이 왕관의 가치를 귀히 여기지 않고 왕관을 희롱하면, 신하들도 공적 업무는 대충 하고 사적 연줄 잡기에 급급해지며 민심은 떠난다. 수없는 무도한 짓으로 왕관을 희롱한 연산군은 폐위되어 교동으로 안치되었다. 1. 외로운 왕자     연산군 이륭이 태어나자 성종은 경사라며 대사령..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성종(재위 1469~1494) 조선 역사상 전대 왕이 승하한 다음 날 바로 왕이 된 유일한 왕이 성종이다. 나이 열세 살에 즉위하였고 정희왕후는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라 7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성종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정희왕후는 기꺼이 수렴청정에서 물러났으며 권력을 넘겨받은 성종은 기다렸다는 듯 탁월한 통치술을 발휘하게 된다.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실 담합으로 즉위하다     예종이 승하하자 재상들은 일제히 정희왕후에게 달려갔고, 정희왕후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이미 한명회 등의 원상들과 은밀히 논의한 결과였다. 적통원자인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왕이 되리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한편, 한명회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예종과 성종 두 왕의 장인이 되었다.      인수대비는 어린 아들 ..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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