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재위 기간이 41년으로 영조, 숙종, 고종 다음으로 길다. 즉위 25년에 7년간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다.
선조는 영특했지만 전체를 총괄하는 리더십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의무는 싫어하면서 권리는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선조 치세는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 인재가 많았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서애 유성룡, 그리고 이순신, 권율, 곽재우, 허균 같은 인재를 모아놓고도 국력 신장을 이루지 못했다.
1. 당쟁의 시초가 된 이조전랑 자리
중종의 아들은 모두 9명으로 대윤과 소윤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군만 살아남았다.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 중 가장 총명해 보인 하성군을 선택했다. 조선에서 선조는 왕의 직계가 아닌 방계로 처음 왕이 된 사례다. 이것이 선조에게 큰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이조전랑에 누구를 천거하느냐를 놓고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신진 사림세력이었던 김효원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왜 5품의 중간 관리에 불과한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다투었을까?
조선의 관리 임명권은 이조에 있었다. 이조판서의 영향력이 의정부의 삼정승 못지 않았다. 이러한 이조판서의 전횡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이 삼사의 추천권을 행사했다. 전랑의 권한에 이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했다.
선조 5년(1572) 이조전랑에 김효원이 추천되었을 때, 심의겸은 김효원이 과거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며 반대하였고 2년이 자나서야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될 수 있었다.
선조 8년(1575) 공교롭게도 김효원의 뒤를 이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심충겸은 외척이라며 반대했다.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분열된 동인과 서인의 공방은 점차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2. 인사권이 야기한 붕당, 동인과 서인
선조는 붕당을 방치했다. 율곡 이이가 탕평책을 건의해도 무시하고 후궁에게 빠져 지냈다. 이런 이이가 1584년 세상을 뜨자 당파 대립은 다시 극으로 치달았다. 그러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선조 앞에 올라왔다. 그 내용은 동인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 회원들이 병권을 강탈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진상이 모호한 사건을 서인인 정철 등이 조사를 맡은 후, 동인 세력을 뿌리 뽑을 기회로 이용하려 하면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에 정여립은 자결하였고, 이 사건으로 숙청된 사람만 동인의 영수 격인 이발 등 1,000여 명에 달했다. 훗날 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도 호된 국문을 당해야 했다.
기축옥사의 배후에 교활한 선조가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당쟁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 대가로 동인과 서인은 완전히 적이 되었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가 있던 선조는 적통 승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의인왕후 박씨가 계속 왕자를 낳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가 이용한다. 선조 24년(1591)에 서인의 거두인 좌의정 정철과 후계자 문제를 함께 거론하기로 하고 입을 다문 것이다. 정철만 홀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했다가 선조의 진노를 산다.
이 일로 서인이 실각하고 다시 동인이 득세한다. 동인은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한다. 북인 이산해는 정철을 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남인 유성룡은 유배를 주장했다. 선조는 남인의 의견을 수렴해 정철을 유배 보냈다.
3. 망명 정부 구상
조정이 당파 싸움으로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년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열도를 통일한 후, "매해 여름은 한양에서 겨울은 북경에서 보내겠다"며 대륙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선조 23년(1590)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일본에 파견했다. 귀국한 이 둘은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김성일은 "군사력도 형편없고 도요토미의 인물도 용렬해 침입하기 어려운데 대비 운운하면 민심만 사나워진다"라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동인인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선조도 이에 동조하여 전쟁 방비책마저 포기한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단숨에 부산포를 점령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왜군은 5월 2일 조선의 수도 한양까지 함락한다. 파죽지세였다. 이에 선조는 파천과 요동내부책 즉, 한양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하여 명나라의 제후로 살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분조하여 왜군과 싸우게 하였고 4월 30일 새벽 선조는 궁을 빠져나갔다.
한편 왜군은 한양에 이어 개성, 평양을 함락하고 선조가 있는 의주성만 남긴 채 함경도 일대까지 점령했다.
4. 선위 파동과 전쟁영웅 핍박
한반도 중남부 지역서 다행히 수군 이순신의 활약으로 왜군은 보급로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고무된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고, 명나라 원군 4만 5,000여 명이 내려왔다. 1593년 10월 선조는 한성으로 돌아왔다.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세 차례 강화 회담(1593~1596)을 한다. 강화에 속았다는 사실을 안 도요토미는 강화 교섭을 깨고 1597년 조선을 재침공 했다.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왜군의 진격로가 막힌 데다가 이듬해 8월 도요코미가 병사하며 왜군은 자진 철수했다. 이로써 7년 전쟁이 끝났다.
개전 초 선조는 한양을 떠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분조를 실시하였다. 광해는 도망간 선조와 달리 함경도와 강원도를 누비며 백성을 위로했고,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군량미와 병기를 조달했으며, 전투에도 앞장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로써 민심은 선조가 아닌 광해에게 기울었고, 위기의식을 느낀 선조의 계책은 선위파동과 전쟁영웅 제거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선조는 20번이나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때마다 광해와 신하들은 엎드려 울먹여야 했고, 그래야 광해의 효심과 신하들의 충심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을 반역에 연루시켜 죽였으며, 해유령전투에서 최초의 승전을 거둔 신각 장군도 처형했다. 곽재우는 선조의 압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선조는 이순신까지 죽이려 했다. 다행히 주위의 만류로 백의종군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숨졌다.
당쟁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기 보존에만 급급했던 선조가 재위 41년 만에 눈을 감으며, 몇몇 신하만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세자 광해군이 즉위한 후 정쟁이 될 불씨를 지펴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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