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인종(재위 1544~1545), 명종(재위 1545~1567)

by y2ryang 2025. 2. 28.
반응형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었으며 자식이 없었고, 다음 장경왕후는 1515년 세자 호(인종)를 낳고 곧 죽었다. 2년 뒤 중종과 혼인한 문정왕후가 1534년에 환(명종)을 낳았다. 두 왕 모두 하늘이 낸 대효라고 백성의 칭송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사적인 효심으로 공적 권위를 훼손했다. 문정왕후에게 매어 마마보이 노릇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 인종

인종의 어진

 

    인종은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고, 성질이 고약한 문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문정왕후가 서른다섯 살 늦은 나이에 경원군(명종)을 출산했을 때 세자는 이미 스무 살이었다. 이때부터 세자를 대하는 문정왕후의 눈길이 더욱 싸늘해졌다. 

 

    1543년 1월, 세자가 잠들었던 동궁전에 불길이 치솟았다. 윤임이 조사해 보니 동궁전 화재의 책임은 문정왕후에게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기회에 문정왕후를 폐출하기로 작정하고 법에 따라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정왕후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인종이 차버린다. 계모가 그럴 리 없다고 싸고도는 바람에 문정왕후는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런데도 문정왕후는 윤원로, 윤원형을 시켜 세자가 요절하도록 기도나 제사를 드리는 등 온갖 술수를 부렸다.

 

    1544년 7월, 서른 살이 되던 인종이 즉위한다. 형조판서 윤임이 문정왕후 측근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인종은 대비가 된 문정왕후에게 세자 때와 같이 매일 문안을 드리는 등 효를 다했다.

 

    문정왕후는 심신이 날로 허약해졌던 인종을 불러서 다과를 대접한다.  다음 날부터 인종이 심하게 설사를 하더니 위독해졌다. 결국 일어나지 못한 인종이 유언을 했다.

    "내 아우 경원대군을 왕으로 세우라"

 

2. 명종: 위로 여왕이, 아래로 간신이 날뛰다

명종의 어진

 

    인종이 죽자 열두 살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아직 명종이 미성년이라 대왕대비 문정왕후 또는 왕대비 인성왕후 중 한 명이 섭정해야 했다. 이에 관해 윤임이 천거한 사림파의 이언적이 문정왕후의 손을 들어주었다. 명종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8년 동안은 물론이고 그 후 왕후가 사라질 때까지도 허수아비였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명종의 보위를 굳건하게 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하여 반역죄로 몰았다. 이로써 윤임, 유인숙, 유관 등 3대신과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었으며 이를 두고 을사사화라 한다. 

    누구든 문정왕후 세력에 반발할 기미만 보여도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살아 있던 명종 20년(1565)까지 20여 년간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를 부린다.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은 관비의 딸로 태어났으나 윤원형과 공모해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에까지 오른다.

 

     명종이 스무 살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윤원형의 전횡은 계속되었다. 왕의 권위가 추락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백정 출신 임꺽정이 세를 모아 황해도 구월산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경기도까지 누비며 백성들에게 의적 대우를 받으며 3년간 활동했다. 

 

    명종은 즉위 20년째 되던 해 모후가 병사하고서야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윤씨 일파를 정리했다. 하지만 2년 후 서른네 살로 승하했다. 열세 살 외아들을 잃은 명종은 이복동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