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중종(재위 1506~1544)

by y2ryang 2025. 2. 28.
반응형

중정의 어진

 

    연산군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조선이 중종의 약 40년 치세 동안 조광조를 발판 삼아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신하를 질투한 왕으로서의 중종은 그 그릇이 너무 작고 우유부단하였다. 조광조는 정도전에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인재였다. 그의 죽음이야말로 중종의 한계를 드러낸 최대 실책이었다.

 

1. 갑자기 씌워진 왕관

 

    연산의 왕관을 벗긴 신하들은 진성대권의 집에 몰려가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박원종 등이 엎드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진성대군은 공신들의 강요에 눌려 받아들여야 했다. 즉, 왕이 되려는 능동적 의지 없이 신하들의 강요에 의해 왕관을 쓰게 된 것이다.

    

    중종은 일곱 살 때 성종이 죽고 나서 이복형 연산군 아래서 온갖 눈치를 보며 성장했다. 이후 반정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성종처럼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어 했다. 

    반정 주도 세력인 훈구파가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중종에게 왕관을 씌우고 제일 먼저 부인 단경왕후 신씨와 이혼하기를 요구했다. 훈구파가 역적으로 몰아 죽인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놓아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조선 최초의 필화사건과 조광조의 등용

 

    중종 5년(1510)부터 박원종, 유순종, 성희안이 세상을 하직하며 공신 세력이 점차 위축된다. 그제야 중종은 양대 사화에서 화를 입은 신하들을 복권해 주고, 귀양 갔던 사림 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연산군이 파괴했던 여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장려하는 등 유교 정책을 복구했다. 

 

    중종 6년(1511)에 조선왕조 최초의 필화사건이 터진다. 당대 유학자인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이 화근이었다. 3,000자 정도의 단편으로, 인생의 화복은 모두 윤회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요즘으로 치면 웹 소설 형태의 귀신 이야기다. 채수는 성종 때 강직한 언관이었다. 공신들의 전횡을 귀신 이야기로 꾸짖고자 이 소설을 썼던 것이다. 지도층을 불신하는 민중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채수의 필화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반정 3 공신이 차례로 운명하던 시기에 중종 10년(1515) 성균관에 있던 조광조를 6품 직인 조지서 사지로 등용한다. 공신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 볼 심산이었다.

 

3. 기득권 청산은 인재 등용 방식의 변화로부터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의 후계자로 무오사화 때 숙청당한 인물이다. 

    조광조는 철인 구주정치를 표방하며 두 가지 개혁안을 내놓았다.

    첫째, 향악이다. 향촌의 자치 규범으로 1) 예의 있게 교류한다 2) 서로 덕 세우기를 권장한다 3) 과실은 서로 바로잡는다

             4) 힘든 일은 서로 돕는다 5) 마을마다 어른들이 중심이 되어 이 덕목을 젊은이들에게 잘 가르치며, 서로 상부상조

             한다.

    둘째, 현량과이다. 이는 인재등용책이다. 과거시험이 점수로 뽑는 정량 평가라면, 현량과는 성품, 도량, 재능, 학식, 행실

             등 다면을 종합해서 뽑는 정성 평가이다.

    입지가 좁아진 훈구파는 현량과로 등용된 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대사헌으로 승진한 조광조의 꿈은 정도전의 건국 비전과 맞닿아 있었다.

 

4. 조광조와 중종의 동상이몽이 만든 기묘사화

 

    중종은 조광조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며 그를 경계하였고, 이런 중종의  심경 변화를 읽은 훈구파가 조광조 일파의 일망타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조광조가 중종 14년(1519) 기묘년에 위훈 삭제를 건의한다. 중종반정 공신 중 과도하게 공을 인정받은 76명의 위훈을 삭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반정 공신들은 중종을 왕으로 옹립한 세력이며, 아직도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광조의 상소를 일곱 번 물리친 중종도 조광조의 집념에 의해 공신 일부의 공신 등급을 개정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아때부터 중종은 조광조식 도학 정치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중종의 심정을 읽었던 훈구파 대신 중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심정이 희한한 음모를 꾸몄다. 

    대궐 후원의 큰 나무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잎사귀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잎사귀를 받은 중종이 와들짝 놀랐다. '주초'가 왕이 된다는 것은 조씨인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 여긴 것이다. 

    중종은 개혁의지가 없었고 의심이 많았다. 언제든 기분에 따라 상반된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었다. 소인배 중종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체포 명령을 내렸다. 조광조를 두둔한 영의정 정광필도 그 자리에서 하옥되었다. 이렇게 터진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70여 명이 사약을 받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