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처음부터 명확한 원칙에 따라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세력이 세운 계획에 대하여 후일 종합한 책이 "경국대전"이다. 말 그대로 '나라를 경영하는 큰 원칙'이라는 뜻이다.
유형원이 저술한 <반계수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 잘 짜인 국가 개혁의 청사진이다. <반계수록> 전체 26권 중 1권, 2권의 제목이 '전제(田制)'이다. 전제를 한글로 바꾸면 토지제도이다. 토지제도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것이고, 전제는 소유권뿐만 아니라 조세제도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1. 유형원: 공전제(共田制)
반계 유형원은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실학자이자 작가이다.
고전적 정전제란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으로 구획된 토지제도의 운영을 뜻한다. 이 정자형 토지에서, 주위에 있는 토지가 사전이고 가운데 있는 토지가 공전이다. 사전에서 수확한 곡식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대신 사전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하여 수확한 곡식은 모두 국가의 몫이 되었다. 사전을 경작하는 사람은 국가로부터 사전을 받는 반대급부로 공전에서 일하는 것 외에 군역의 의무를 추가적으로 부담하였다.
유형원은 당시 조선 현실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에 의해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 은결(隱結)이 너무 많았다. 중앙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토지가 많아 경제적 무질서와 부패의 원인이 되었다.
둘째, 토지 겸병(兼倂) 문제였다. 이는 넓이가 고정된 땅에서 소수의 사람이 많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반대로 다수의 사람이 토지를 잃어가는 것을 뜻한다. 자기 토지를 잃은 사람은 남의 토지를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 했고, 이로인하여 경작자들은 지력(地力)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국가와 백성 간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결국, 지력은 점차 고갈되었고 경작지는 황폐화되는 결과에 이르렀고, 국가로서는 세금과 군역을 부과할 수 있는 백성을 잃게 된다.
유형원은 고전적 정전제를 그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전제의 원래 취지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집요했다. 이를 위해 그가 주장한 것이 공전제다.
공전제는 토지 사유와 거래를 금지하고, 백성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역에 상응하게 차등적으로 토지를 지급받고, 세금은 토지 소출의 10분의 1을 내는 것이었다. 공전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백성들이 어떻게 땅을 확보할 것인가였다. 그런데 유형원은 이에 대해 현실적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훌륭한 임금이 마음을 다해서 공전제를 실시하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2. 이익과 박지원: 한전제(限田制)
이익은 유원형보다 59년 늦은 1681년에 태어났다.
이익 역시 정전제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보았다. 하지만 토지 소유 양극화의 당연한 귀결인 ,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정전제를 현실에서 곧바로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한전제를 주장했다.
한전제의 핵심 개념은 영업전(永業田)이다. 평균적 소농이 자활할 수 있는 최소 면적의 토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국가가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는 것에 대한 지주들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영업전의 규모를 넘는 지주의 토지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매매의 허용을 주장했다. 거대 규모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분할을 유도하고, 일정 규모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국가가 안정적 유지를 도와주는 정책이었다.
박지원은 이익보다 56년 뒤에 태어났다.
박지원의 토지개혁안은 유형원과 이익의 토지개혁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무엇보다 농촌의 가장 큰 문제를 거대 지주들에 의한 토지 겸병으로 보았다. 농촌에서 관찰한 결과 토지 소유 규모의 상한을 정하는 방식으로 겸병 확대를 제한하려 했다.
3. 정약용: 정전법
정약용은 영조 38년(1762)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이다.
정약용은 수많은 책을 저술했지만, 스스로 꼽은 대표 저술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이다. 그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경세(經世) 문제였다.
정약용이 주장한 정전제는 유원형이 말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본래 정전제에서의 사전은 수확한 곡식의 귀속에 따라 붙여진 말이었으나 정약용의 사전은 사적 소유지를 뜻했다. 그는 지주제를 인정했다. 최소한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원형이 살았던 17세기 중반에는 백성들이 경작지 말고는 다른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도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유일한 산업은 아니었다. 수공업과 상업이 일정 수준 발전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직접 나눠주는 방식으로는 백성들의 살림을 책임질 수 없다고 보았다. 차라리 조세 운영을 원칙대로 하는 것과 농업을 포함한 다른 다양한 직업을 권장하는 것이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학, 조선 지식인들이 꿈꾼 나라: 프롤로그(Prologue) (0) | 2025.03.07 |
---|---|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고종(재위 1863~1907), 순종(재위 1907~1910) (2) | 2025.03.02 |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순조(재위 1800~1834), 헌종(재위 1834~1849), 철종(재위 1849~1863) (0) | 2025.03.01 |
조선왕조실록 500년: 정조(재위 1776~1800) (0) | 2025.03.01 |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영조(재위 1724~1776) (0) | 2025.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