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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고종(재위 1863~1907), 순종(재위 1907~1910)

by y2ryang 202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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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사진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은 전대미문의 격변기를 마주해야 했다. 고종은 세계열강이 조선을 선점하려는 등 외부의 드센 도전과 내역 역량의 빈곤이라는 이중 난제를 떠안고 조선의 리더가 되었다. 상황이 태조보다 더 결단력 있고, 광해보다 통찰력 있고, 정조보다 더 치밀한 지략을 요구했고, 리더십도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고종은 간 보는 리더로, 왕의 권리는 누리면서도 과제는 누군가 떠맡기를 원하는 유형이었다.

 

    위기가 깊을수록 리더는 배짱을 가지고 백성과 함께 꿈꾸는 미래를 제시하여야 한다. 위기돌파의 아이디어는 통념을 깨는 데서 나온다. 리더 역시 자신의 역할 변화를 수용할 각오를 해야 한다. 고종이 시대의 변화 앞에 왕조 체제도 바꿀 각오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종은 집권 초 10년은 흥선대원군에게, 친정 후에는 민비에게 휘둘렸으며, 헤이그 특사 파견 후 일본에 의해 퇴위되었다. 순종은 일본이 강제로 씌워준 왕관을 썼을 뿐이다.

    같은 시기 일본은 국제 변동에 적극적으로 부응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설 수 있었다. 조선이 가장 뒤처졌다. 그래서 주권까지 강탈당한 것이다.

 

1. 대원군, 준비된 리더였으나 과거 지향적이었다

 

    고종의 등극은 세도정치의 산물이었다. 순조 이후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리다가 헌종 15년 간 풍양 조씨와 경쟁과 연대를 거듭했다. 다시 철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독점하다시피 한다.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는 이 구도를 깨기 위해 이하응과 결탁하여 철종의 후임으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레 앉혔다. 그리하여 명복은 고종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열두 살 아들을 대신해 10년간 섭정한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가 궁도령(宮道令)이라며 천대하던 사람이었다. 왕족임에도 남루한 옷을 입고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맨발로 부자들의 집에 찾아가 구걸하는 등 비정상적으로 행동했다. 이 모든 것이 안동 김씨에게 자신이 야심이 있는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거짓 행세였다.

    고종 즉위 후 섭정을 시작하자 파락호의 경험을 살려 다 함께 새롭게 하자는 '함여유신'의 기치를 내걸고 부정부패를 뽑고자 다음의 네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 세도정치를 타파하려 했다. 그래서 김좌근 등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안동 김씨 세력의 근거인 비변사를 의정부로

             흡수했다.

    둘째, 이도쇄신 이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당색과 지방색의 구별을 없앴다.

    셋째, 당쟁의 근거지였던 전국 600여 사원을 47개로 대폭 줄였다.

    넷째,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 제도와 무명잡세를 없앴으며, 상민들만 내던 군포(軍布)를 양반도 내도록 호포제(戶

             布制)를 시행했다.

 

    흥선대원군은 준비된 리더였고 강고한 의지로 실행하는 리더였다.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내정은 안정되었다.

 

    당시 청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태평천국의 난이나 아편전쟁이 모두 서학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원군 역시 성리학적 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에 1886년 1월 전국의 천주교도를 박해는 병인박해(1866~1871)를 일으켰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쇄국정책까지 강행했다. 서구의 종교와 기술 문명을 혼동한 것이다. 

    당시 세계는 민첩성이 최고였던 시기였고 조선의 주변국들은 모두 급변하는데 조선만이 고요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 만경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한다. 조선의 관리가 물과 식량을 공급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고 물러가라고 요구했지만 오히려 대포를 쏘는 등 행패를 부리며 중군 이현익을 억류했다. 양측이 충동한 결과 평양민의 화공으로 배가 불탔다. 

    3개월 후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통상 교섭을 요구했다. 물론 대원군이 거절하고 양헌수 장군을 보내 물리쳤다.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네럴셔먼호가 소각된 책임을 묻겠다며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강화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광성보를 향해 돌격했고 조선군은 전원 전사했다. 그래도 대원군이 교섭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더 이상 머물러도 실익이 없다고 보고 물러갔다.

 

2. 대원군과 민비의 대결

 

    대원군이 공평과세, 부정부패 척결 등으로 모았던 민심이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비가 마치 여론 악화를 기다렸다는 듯 대원군의 실정을 공격한다.

 

    민비는 대원군의 추천으로 1866년 중전이 된 후, 둘 사이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고종과 궁녀 이씨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난 2년 후부터 어색해진다.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듯 편애했던 것이다. 민비도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항문이 없어 곧 죽었다.

    이때부터 민비는 대원군의 정적과 가까이한다. 1873년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 10년 치세의 실정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핵심은 당백전 발행이 빚은 재정파탄과 물가 인상이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을 유배 보내고 친정을 하기 시작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고종 12년(1875), 일본 군함 운양호가 측량을 빌미로 강화도 초지진까지 접근하며 조선군의 공격을 유발했다. 조선군은 대포를 쏘았으나 운양호에 다다르지 못했고, 운양호에서 쏜 신식 포탄이 두 시간 동안 초지진을 강타했다. 운양호 사건은 일본의 사전 각본에 따른 것으로 조선의 선제 공격에 따라 일본이 자위권을 발동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도리어 조선에 운양호 사건을 사죄하는 협상을 요구하며 군함 6척을 다시 보내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한다. 조선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가 통교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여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제물포항과 부산 원산항을 개방하고 일본인의 치외법권도 인정했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대륙 진출을 위해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고 있었다.

 

    대원군이 하야한 1874년에 민비는 순종을 출산하며 입지가 더 탄탄해졌다. 그해 11월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상자를 열자 폭탄이 터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민승호가 숨을 거두며 대원군을 암시하듯 운현궁을 가리켰다. 1880년 궁녀 이씨의 아들 완화군이 급사하는데 민비가 개입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3.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민비는 대원군과 반대로 개화 분위기를 조성했다. 1881년 개화파로 구성한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배워오게 했다. 민비의 노력으로 개화 분위기가 확산됐지만 각 지방에서 도적 떼가 들끓고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는 민심까지 생겨났다.

 

   임오군란

 

    민비와 고정은 정권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며, 일본의 후원을 받아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병조판서 민겸호를 그 책임자로 두었다. 별기군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며 종래의 5영(훈련도감, 용호영, 금위영, 총융청)을 무위영과 장위영의 2개로 통폐합했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이 대량 해고된 것은 물론 남은 병사들은 구식 군사라 차별받으며 13개월치 급여를 받지 못했다. 선혜청에서 밀린 급여를 준다며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주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군사들이 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찾아가 불을 지르고, 다음 날 민비를 잡으려고 창덕궁 등을 뒤지고 다녔다. 

    이때 양반 자제만 모아놓은 별기군은 하인에게 업혀 훈련받을 정도로 나약해 집압하지 못하였다. 차별받던 구식 군사들은 민씨 일파를 처단하면서 대원군을 찾아갔으며, 수동적인 고종은 그 기세에 눌려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실각한 지 10년 만에 재집권한 대원군은 즉시 5군영 체제로 복귀하고,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다. 

    민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인 충주로 피신했다.

    

    조선의 파병 요청에 의해 청나라는 군사 4,500명을 파병했고 고종 19년(1882) 7월 13일, 대원군이 2차 집권한 지 33일째 되던 날 대원군은 청나라 진영에 갔다가 원세개에게 결박당해 천진으로 압송됐다. 

 

    제물포조약

 

    일본도 임오군란 직후 군사 1,000여 명을 보냈지만, 별기군 사태로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 주둔만 하고 있었다. 임오군란 때 죽은 호리모토 소위와 일본인 조교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과 유족에게 배상하기로 한 금액이 1년 예상의 3할에 해당하는 거액이었고, 일본 공사관 경비 명분으로 일본군 1개 대대의 주둔을 허용했다. 

 

    갑신정변

 

    민비의 친청 정책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구상하고 일본대사를 만나 일본 공사관 병력 일부와 재정 지원을 받아냈다. 

    개화파는 고종 21년(1884)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민씨 세력의 거물인 민태호, 민영목, 수구파의 거물 한규직, 윤태준 등을 처단하고, 개화당 요인과 종친으로 구성된 정부를 수립했다.

 

    갑신정변에 당황한 청나라는 원세개가 지휘하는 청나라군 1,500명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개화당과 일본군 150명으로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이후 원세개가 감국대신이 되어 10년간 마치 조선의 총독처럼 행세했다.

 

4. 친일에서 친청, 다시 친러로 바꾼 민비의 최후

 

    민비는 집권 초기 일본을 의지했다가 임오군란 후부터 청나라를 의지했다. 나라 외교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영향력만 비대해져 내정은 더 혼란해졌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동학교도들이 1894년 3월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봉기를 한다. 동학교도였던 김구도 전투에 참여하는 등 동학혁명이 파죽지세로 확산하자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5월 5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했고, 다음 날 일본군이 한양과 가까운 제물포에 상륙했다. 

    조선이 청일전쟁터가 될 상황이 되자 동학군과 관군이 급하게 전주에서 만나 일단 싸움을 중단하기로 한다. 조정에서 양국에 철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사대문을 장악하더니 경복궁까지 점령했다.

    조선총독처럼 행세하던 원세개가 줄행랑쳤다.

 

    일본은 친청 정책을 편 민비를 견제하기 위해 일흔넷 고령의 흥선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웠다.

    대원군은 군국기무처라는 비상 내각을 구성하고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해 갑오개혁을 진행한다. 물론 일본 측 시나리오대로였으며 단발령 등 10여 건의 법령을 공포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하며 일본 육군이 만주를 넘어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 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간섭한다.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는 급속히 팽창하는 일본을 누르기 위해 독일, 프랑스와 삼국동맹을 맺고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라는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를 지켜본 민비는 고종을 노골적으로 친러 배일로 돌아서게 했다.

    배신당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낭인들을 데리고 경복구에 잠입해 민비를 시해했다. 1895년 10월에 발생한 이 을미사변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한다.

 

    이듬해 2월 조정 내 친러 세력이 러시아와 공모해 고종을 러시아 영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친러정권을 수립한 고종은 먼저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단발령까지 취소했다.

    그 후 고종은 각국 외교관들에게 휘둘리며 많은 이권을 넘겨 주었다.

 

5. 독립협회 창설과 고종의 강제 퇴위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이 1895년 12년 만에 귀국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이 협회에 이상재, 안경수, 이승만, 안창호, 신채호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축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자주권 선양을 요구하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민심이 고조되었다.

    결국 고종이 1년 만에 환궁했다. 고종은 추락한 왕권을 회복해 보려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1897년 10월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후 독립협회에 의해 권력 누수가 생길 것을 염려해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시켰고, 독립협회 간부들을 모두 체포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치열하게 진행되던 러일전쟁은 1905년 5월 일본 함대가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대파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모두 이긴 일본은 대놓고 조선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필리핀을, 영국은 인도를 독점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에게 양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내각 총리 이완용은 내각 대신들과 고종을 만나 칼까지 빼 들고 양위하라고 협박했다.

 

6. 3.1 운동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1907년 7월에 조선의 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등극했다.

 

    이토는 순종이 즉위하던 바로 그해에 이완용 내각을 동원해 순종과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했다. 통감에게 사법권, 행정권을 주며, 일본군을 각부 차관에 임명해 차관 정치를 시작하는 것은 물론 군대까지 해산해야 했다.

    해산한 군인들이 전국에서 의병장을 세우고 항일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의병 활동과 애국 계몽운동은 활발히 벌어졌다.

    1906년 안창호가 미국에서 신민회를 결성하고 다음 해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조직했다.

    1908년 1월 보성소학교에서 정용택, 이용직, 지석영 등 105명이 모여 애국 교육을 목적으로 기호흥학회를 창립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육군 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0년 5월 30일 세 번째 통감으로 부임했다.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 등을 앞세워 한일합병조약을 억지로 만들어냈다. 경술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이었다.

 

    1919년 1월 20일 건강했던 고종이 서거했다. 

    방방곡곡에서 대성통곡이 터져 나왔으며, 일본 동경에서는 이광수, 최팔용 등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급기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렇게 시작한 3.1 운동이 각지로 번져나가 200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상해에서 4월 1일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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