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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실학, 조선 지식인들이 꿈꾼 나라: 프롤로그(Prologue)

by y2ryang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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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연구모습

 

     적폐의 사전적 의미는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다. 어느 시대든 부조리가 쌓이면 적폐가 등장하는 법이다. 조선은 고려의 적폐를 청산하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었다. 그러나 결국 조선도 적폐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나라 곳곳에 쌓인 적폐를 청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등장했다.

 

    원래 실학은 허학(虛學)에 대비된 진정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실학이 특정 시기의 학문 사조로 지칭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를 중심으로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부터다. 다산 정약용의 별세 100주년을 기점으로 정약용의 학문이 실증성과 실용성 그리고 개혁성을 겸비한 근대적 사상이라고 재평가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의 개념이 탄생했다.

 

    실학은 명백히 18세기 조선 여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은 우리 학문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낸 시대정신이었다. 일군의 실학자들이 실천적인 태도로 개혁, 개방, 실용주의 관점에서 새로운 학문적 성취를 이뤄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실학을 환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학은 이제 '실체'와 '환상'이라는 전혀 상반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형편이다. 

    실학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의심과 회의는 학계에서부터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 맹아론'과 서구적 근대화에 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일어나면서 실학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근대의 맹아로서의 실학의 가치를 재고하게 된 것이다. 실학은 근대 국가를 지향하던 시기에 지식인들의 한시적 관점 위에 구성된 허구적 가상물에 불과하고, 실학자들의 학술 경향이 종래 유학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등 실학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단 연구자만이 실학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실학만 실학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21세기까지 실학 개념을 확장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실학이 특정 시대가 아닌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될 때 실학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 되고 만다.

 

1. 실학이라는 용어의 등장

 

    1930년대 들어와 실학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최남선이 1931년 "조선역사"에서 조선 후기의 신학풍을 근대 학술용어로서 "실학"이라 지칭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정인보, 안재홍 교정의 "여유당전서"가 간행되면서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 경향을 일컫는 명칭으로 "실학"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1930년 시작된 실학 연구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에 더욱 활발해졌다. 천관우는 최남선과 정인보의 견해를 계승하여 영조 및 정조 연간을 전후하여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실학으로 규정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실학 연구는 더욱 활발하여 유파별로 구분하기에 이르었다.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로 구분하는 등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으로서 실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민족주의와 근대 지향적 측면을 북학파를 통해 밝혀보려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2. 국가 개혁을 위해 탄생한 학문

 

    실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시대 요청에 부응한 학문이었다.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라는 낡은 시대의 자폐적인 정신 상황을 반성하는 한편, 국가의 총체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학문의 사명으로 삼았다.

    화이론의 변화와 함께 17세기 이후 서양 문물의 전래도 실학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서학으로 명명되는 서양 문물과 천주교는 조선의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이었다.

    실학의 발생과 발전에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개혁정책도 큰 힘이 되었다. 1608년에서 1708년까지 100년의 노력끝에 시행하게 된 대동법, 1750년에 이루어진 균역법, 1774년 공사노비의 신공(身貢) 폐지, 도망한 노비에 대한 추쇄(推刷) 폐지 등은 백성들의 처지를 크게 개선하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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