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세종(재위 1418~1450)

by y2ryang 2025. 2. 26.
반응형

새종대왕의 어진

    세종은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의 왕 중 최고의 명품 리더십을 펼쳤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언급한 부족사회의 문화 제작가 브리콜뢰르(bricoleur)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 레오나르도 다비치,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이 브리콜뢰르의 리더십을 구사했다.

    

    세종은 신하는 물론 백성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했다.   

    "조선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이것이 세종의 통치철학이었다.

 

1.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다.

 

    이도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다. 오래나 가뭄으로 백성의 3분의 1이 유랑민이 되었다. 이런 난국에 즉위한 세종의 첫 일성은 "어진 정치를 펴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왕 노릇을 하는 이유를 백성의 행복에서 찾았던 것이었다. 그 후 32년 치세 동안 이 약속에 충실했다.

 

    세종이 말한 백성은 양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당시는 엄연히 신분사회였다. 신분사회에서 노비는 우마 취급을 받았고 이를 당연시 하였다.

    이런 문화에서 세종은 삼복법을 만들었다. 설령 노비가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3심을 거치라는 것이었다. 

    노비의 출산 휴가도 이전에 7일에 불과했던 것을 100일로 늘렸다. 노비의 남편에게도 아이 양육을 돕도록 30일 휴가를 주었다. 

    세종에게는 천민도 양민도 모두 '하늘이 낸 백성'이었다. 

 

2. 천것도 내 백성이다

 

    세종은 백성의 삶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반상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해도 세종의 인재 발탁 기준은 오직 하나, 그 일을 해낼 수 있느냐였다. 가문과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세종 시대에 농사철에 가뭄이 심하였으나 경상도 동래현만큼은 가뭄이 들어도 풍년 농사를 지었다. 바로 동래현의 노비 장영실이 만든 농기구와 물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불러 왕의 옷과 궁중의 금은재물을 책임지는 '별좌'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로써 장영실은 늘 세종 곁에 있게 되었다. 

    세종 24년(1442) 장영실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개발했다. 천문시계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천체 관측 기구 등을 만들어 냈다. 

    개국공신 황희석의 노비 박자청도 건축 재주가 좋아 정 2품 공조판서에 올랐다. 한양 설계는 정도전이 하고, 도성의 토목과 건축은 박자청이 하였다. 이런 박자청을 세종은 정1품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다.

 

3. 왕의 낯빛을 살펴 발언하지 말라

 

    세종은 정책 결정에 앞서 여론을 충분히 살폈다. 그 과정은 의논과 수렴, 그리고 결단으로 이어졌다. 왕 독단의 정치가 아니라 공론의 정치를 펴나간 것이다.

 

    세종은 재위 32년간, 경연 횟수가 한 달 평균 2회 이상, 총 2,000회 가량이다. 국정을 논할 때 세종은 서두에 당부했다. 신하들에게 현안이 절실하면 임금이 싫어해도 강직하게 주장하고, 그렇지 않다면 임금이 좋아해도 반대하라는 '절실강직'을 주문했다. 달리 말해 임금의 낯빛을 고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실례로 세종은 1424년 2월 6일 어전회의에서 청주에 귀양 간 양녕대군을 이천으로 옮기는 안을 내놓았었다. 양녕대군이  누추한 초가집 대신 저택을 지어 편히 살기를 바랐다. 이에 좌의정 이원과 이조판서 허조가 이구동성으로 반대의 의견을 아뢰었더니 세종은 이후에도 같은 사안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형에게 베풀고 싶었던 사사로운 정마저도 공공성에 위배된다면 포기한 것이었다.

 

4. 최초의 국민투표

 

    세종은 통치의 요체란 애민이며, 애민의 시초는 바른 제도라는 신념이 강했다. 어떤 제도가 바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맹자에 따르면 어진 정사는 조세제도에서 시작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조세제도는 답험손실법이었다. 관리가 논밭에 나가 소작물 현황을 파악해 과세하는 것이었다. 공전(公田)은 수령이 사전(私田)은 전주가 답험했는데, 수령과 전주가 뇌물을 받고 세금을 줄여주는 일이 잦아지면서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의 납세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세종은 이런 폐단을 없애고자 세법 개정을 구상하면서 선비부터 백성의 의견을 차근차근 수렴해 나갔다. 또한, 과거에 조세에 관한 문제를 출제하면서 3년간 꾸준히 세법 개혁의 여론을 모았다. 세종 12년(1430)에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기로 하였다.

 

   세종은 "신조세법의 가부를 6조와 각도의 수령은 물론 여염의 가난한 백성에게까지 물어라"라는 상상하지 못한 어명을 내렸다. 납세 의무가 없었던 노비와 여자를 제외하고 , 여론조사에 응한 백성만 17만 명이었다. 다섯 달 동안 취합한 여론의 결과,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 비옥한 평야 지대에서 찬성 90,657명,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척박한 산지에서 반대 74,148명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 결과였다.

    1962년 11월 5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하여 과반의 찬성을 얻어낸 것은 그 동안 관료들이 기존의 법을 빙자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이 15년간 공법을 추진할 동안 황희는 줄기차게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세종은 이에 황의 등 반대자들을 신조세법의 허점을 파악하고 보완하는 레드 팀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5. 백성과 소통하는 도구를 허하라

 

    세종은 백성을 '어리석지만 신명한 존재'로 보았다. 백성은 어리석어서 글을 모르지만 신하들이나 왕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세종은 바로 그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세종이 아무리 개혁적인 왕명을 내려도 백성이 글을 모르니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언문(諺文)을 만들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후 10여 년이 흐른 1446년 9월에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했다. 정보 소통의 혁신적인 도구였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최만리가 올린 상소를 구심점으로 정보를 독점하던 사대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세종은 이에 대해 논리적 설득과 일시적 격리를 병행했다. 

    한글의 탄생으로 통치 대상인 백성이 역사의 주체가 될 통로가 열린 것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