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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태종(재위 1401~1418)

by y2ryang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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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어진

 

    목적 달성에 효과적이기만 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태종은 한 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으며 원하는 목적을 확실히 이루었다. 태종 같은 결과 지향적인 리더들은 항상 '왜'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 다음 그 해답으로 '어떻게'를 찾는다. 즉, 과정은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태종의 리더십

 

    첫째, 목적에 부합하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 탁월했으며 무엇보다 핵심을 짚을 줄 알았다. 

             그 결과 태조 이성계의 날개인 정도전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어떠한 비난도 감수할 줄 알았다.

             리더의 기본책무는 가치평가에 따른 방향 제시다. 이를 실행하다 보면 본의와 달리 찬반이 생겨난다.

    셋째, 무엇보다 행동력이 탁월했다.

             어떤 문제든 과거의 감정이나 인연, 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신속하게 결단했다. 

 

    태종처럼 결과 중심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가 있다. 오래된 지배층의 교체와 동시에 불교적 가치관이 유교적 가르침으로 대체되는 조선의 건국 초기와 같은 시기이다. 이런 대혼돈의 시기에 태종은 유약한 성군보다 강인한 악군을 자처하며 조선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같이 갈 수 없다면 제거하라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태종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태종은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충효를 주요 가치로 삼은 유교의 나라를 열어놓고도 그 가치를 뒤집는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어떤 것도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때는 1388년 5월. 그런데 왜 4년이나 흐른 다음에야 조선왕조가 출범했을까? 바로 이성계의 온화한 성품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당시 이방원, 정도전 등 역성혁명론자들이 왕으로 거듭 추대하였지만 거절했다. 이로 인하여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었고, 이성계는 여러 번 위기를 겪었다.

    위기를 감지한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하여가로 심중을 떠보았으나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단심가로 응대했다. 이성계는 이런 정몽주를 존경하였지만 동시에 분노도 같이 느꼈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달리 가야 할 길에 장애가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제거했으며, 정몽주 역시 그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성계의 책사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왕도(王道) 정치를 바랐다면, 이방원의 책사 하륜은 패도(霸道) 정치를 지향했다. 패도정치에서는 군주는 신성한 존재로 통치를 위해서라면 공신과 친척은 물론 가족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뜻이 다른 이방원과 정도전은 같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2. 대의명분은 오로지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

 

    태조 이성계가 물러나고 이방과가 옹립된 후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모질고 독한 이방원도 이때에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부인 민씨가 갑옷을 입혀주며 독려하는 바람에 이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이방원은 전권을 장악한 후 사병 혁파에 착수했다. 병권을 통합해야만 나라가 안정된다는 명분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무기를 숨기면서까지 자신의 사병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 이방원이었으나, 자신이 군권을 장악하자 모든 귀족의 사병을 없애버렸다. 이방원에게 대의명분은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 천지에 이방원을 거역할 힘을 가진 집단이 모두 사라졌다. 정종도 더는 왕위에 머무를 수 없어 태상왕 태조의 허락을 받고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3. 태조에게 옥새를 받아내다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정도전과 아들들을 제거한 이방원에게 환멸을 느껴 옥새를 품고 함흥으로 떠났다. 불효자인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이에 태종은 왕권의 정당성 확보와 민심 안정을 위해 태조에게 귀성을 청원하는 차사를 보냈으나 야사에 따르면 모두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여기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왔다던 것이다.

    태종은 태조의 환궁이 더 다급해졌다. 그대로 함경도에 머물면 여진족들까지 태조를 이용해 도발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태종은 고심 끝에 무학대사를 보내기로 했다. 태조는 별다른 의심없이 오랜만에 벗이 찾아왔다며 반가워했다. 이 때 태조는 무학대사에 의해 맺힌 응어리를 풀고 귀성하게 되었고, 태종에게 옥새를 건넸다.

    이 때 태종은 엎드려 울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태종의 눈물에 대하여 태종의 측근들은 '효심의 눈물'이라 하였고, 태종을 싫어한 쪽은 '포획자의 눈물'이라 하였다.

 

4. 선위 파동은 충성도 테스트

 

    태종은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을 식별하는 데 민감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에게 공존이란 승리 후 베푸는 시혜일 뿐, 어중간한 상태의 상호 의존은 아니다. 

 

    원경왕후 민씨와 처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태종의 왕위계승은 불가능했다. 민씨의 두 동생 민무구, 민무질도 두 번의 왕자의 난 때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이로써 태종의 1등 공신에 하륜, 이숙번과 함께 민무구, 민무질이 올랐다. 그 후 태종은 왕권을 행사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개국공신과 자신이 세운 공신들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선위파동   

 

    공신세력을 흔들기 위해 태종이 선택한 방법은 선위파동이었다.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겠다며 신하들의 반응을 떠보는 것이다. 

 

    1608년 선위파동이 일어났고, 그 배경에는 민씨 형제가 있었다.

    태종은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낼 것 같으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처가 쪽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족을 지켜줄 만한 아들에게 왕위를 주고자 했다.

    태종은 민씨와의 사이에서 양녕, 효령, 충녕, 성녕 4남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4녀를 두었다. 태종은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양녕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며 친하게 지낸 두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과 어울리며 방탕한 기질을 드러냈다.  더욱이 민씨 형제는 양녕보다 더 총명한 충녕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더니 테종에게 충녕을 제거하라고 건의까지 하였다.  태종은 경악하여 이런 민씨 형제는 더 이사아 처남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태종이 양녕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얼마 후 어린 세자의 집권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민씨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로써 민씨 형제는 유배지 제주에서 자결해야 했다. 물론, 양녕도 쫓겨났고 충녕이 세자가 되었다.

 

5. 태평성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하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에 앉히고 3개월 후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태종은 권력욕이 강했지만, 왕권의 안정과 왕조의 흥성을 더 중시했다. 자신이 건재할 때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왕자 간 분쟁을 막고, 노회한 신하들로부터 왕권이 농락당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시대로 무치를 끝내고, 문치가 열리길 바랐다. 자신과 태조가 무력으로 창업했다면 아들 충녕은 덕으로 조선을 다스리길 바랐던 것이다.

 

    세종의 즉위 후 장인 심온이 왕위 교체를 알리는 사은 주문사로 명나라로 출발한다. 심온의 영향력과 세도가 하늘을 찔렀던 만큼 태종은 불쾌했던 것이다. 얼마 후 병조참판 강상인이 의금부로 끌려왔다. 강상인이 금위의 군사를 나누면서 상왕에게는 아뢰지 않고 세종에게만 알렸다는 죄명으로 태종이 직접 국문을 하였다. 강상인은 고초에 못 견뎌 심온을 핑계로 삼았다.  그 결과 심온은 처형 당하고 그 가족까지 천민으로 전락했다. 다만, 심온의 딸 소헌왕후 만큼은 폐비하지 않았다.

 

    태종이 사람을 제거하는 원칙은 첫째 통치 구상에 방해되느냐, 둘째 핵심 인물이냐였다. 다른 왕들처럼 삼족을 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몽주, 정도전 등을 제거할 때에도 자손은 놓아두었다.

 

    태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태종보다 태조를 더 닮았었다. 세종은 토론 때는 군림하지 않고 반대 의견도 스스럼없이 내도록 했다. 이렇듯 세종은 사람이 좋았기에 태종은 더더욱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공신과 외척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6. 강자에게 강하게, 약자에게 약하게

 

    태종은 강한 권력자들과는 피바람을 일으켰으나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며 각양의 편의 제도를 만들었다. 조선을 팔도로 분할했고, 호구 수와 인구수를 정확히 파악해 유민 방지용인 호패법을 만들었다. 종로 네거리에 신문고를 설치해 억울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조선의 변방 지역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동시에 왜인들도 무역할 수 있도록 부산포와 제포를 열어주었으나 왜인범죄논결법을 만들어 범죄 행위는 철저히 처벌하였다.

    인재 등용에서도 귀족 위주보다 실력과 능력 위주로 바꾸었다. 유학과 경학에 밝은 권근에게 유교 중심의 인재 양성 제도를 만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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