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

by y2ryang 2025. 2. 26.
반응형

태조 이성계의 어진

태조 이성계는 변혁의 리더였으며 이에 맞는 창조적 혁신 전략을 구사한 인물로 평가된다.

 

1. 변방에서 중앙으로

 

    이성계는 변방의 장수였다. 1258년에 동북면을 강탈한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고, 이곳에서 이자춘은 촌장을 지내며 차남 이성계를 낳았다.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원나라를 압박하던 시기에 이자춘은 고려의 공민왕을 찾아가 고려의 옛 땅을 수복하겠다고 하였고, 99년 된 쌍성총관부를 몰아냈으며 당시, 이성계도 이자춘을 도와 공을 세웠고 그때부터 이성계는 친명파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 10만 대군이 개경까지 내려와 공민왕이 충주로 피란 갔을 때에도 이성계가 사병을 동원하여 개경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나하추가 수만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고, 공민왕은 정휘 장군에게 싸우도록 하였지만 대패하였다. 그 후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에 등용하였고, 원나라 시체들이 산을 이룰 만큼 원나라 군사들을 초토화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동북아 최고의 무장으로 떠올랐다. 이후 지리산에서는 왜적과, 북방에서는 여진족들의 외침을 막아내었다. 특히, 1380년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와 만여 적병을 소탕함으로써 그 입지를 다졌고, 마침내 수문하시중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2. 신진세력의 구심점이 되다

 

    당시 고려는 권문세족이 토지겸병을 추구하여 나라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관료들 녹봉도 지급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에 이성계와 최영은 우왕 14년에 이인임과 염흥방, 임견미 등 그 일당 100여 명을  제거하였고, 그들은 최고 실세가 되어 고려 말 문신을 대표하는 이색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해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가 과거 쌍성총관부에 속해 있었던 철령 이북 땅을 되찾겠다고 통고하였고, 이에 최영은 우왕을 설득하여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친원적이며 친불교적인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날로 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고 신권(臣權) 중심의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친명정책을 선호하였다. 이들을 대표하는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 전면적 개혁을 추구하면서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3. 위화도 회군

 

    외화도 외군은 왕조 교체를 가능하게 한 일대의 사건이었다.

    정벌군을 장학한 이성계는 위화도를 건너 요동으로  들어갈지를 결정하여야 했다. 건너가면 자신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명나라와의 대규모 전쟁도 불가피 하였다. 설령 이성계가 승리하여도 자신의 정치적 배경인 명나라와 원수가 되는 것이었다. 때마침 위화도에 큰 장맛비가 내려 압록강 물이 넘쳐났고, 병참지원은 끊기고 병사들은 배고픔과 전염병에 의하여 전의를 상실하였으며 병사들의 탈영이 늘어났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에게 4대 불가론을 내세워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의논 후 회군하기로 결단하였고, 모든 정벌군의 군사들은 환호하였으며, 최영은 회군하는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대항할 병사를 모으는 것에 실패하였다. 그 결과 최영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우왕은 강화도로 귀양을 떠나야 했으며, 조민수의 의견대로 우왕의 아들이 아홉 살 창왕이 옹립되었다. 창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와 조민수는 갈라서게 된다.

 

4. 이성계의 추진력, 정도전의 기획력

 

    위화도 회군 이후, 군부와 사대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군부

        위화도 회군에서는 조민수가 이성계를 따르는 입장이었으나 관직을 보면 좌군통도사 조민수가 우군통도사 이성계보다 상관이었고, 회군 이후 조민수는 막강한 영향력 아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었다.

 

    ◆ 사대부

        고려 왕실을 유지하면서 개혁하자던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의 온건 사대부과 새 왕조를 만들자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직 개혁파 사대부들로 나뉘어진 상황이었다.

 

        조민수가 민심 이반의 길을 갈 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다음과 같이 건의한 전면적이 개혁을 추진한다.

        첫째,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강탈한 땅을 돌려주자는 과전법이었다.

                 고려에는 절 1만 3,000여 개와 승려 15만이 있었다. 당시 고려의 인구가 400만이었다.

                 조민수가 과전법을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둘째, 창왕을 축출하는 폐가입진이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니 가짜왕을 폐하고 진짜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목자요(木子謠) 유포다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동요를 유포해 민심이 이성계를 향하도록 한 것이다.

 

5. 정도전과 이방원의 충돌

 

    이방원이 돌직구를 날리는 이성계의 행동파였다면 정도전은 기획참모라 할 수 있다. 즉, 좌방원 우도전 이었다.

    이성계는 이 둘을 좌우에 두고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사전(私田)이 모두 공전(公田)으로 흡수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토지는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러한 혁명적 토지개혁으로 조선은 유례없이 강건한 국가가 되어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추진할 수 있었다.

    정도전은 "정치는 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신권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를 통하여 민본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강력한 왕권을 꿈꾸는 이방원은 정도전을 견제하고 있었다. 1398년 봄에 사대문이 완성되었고 같은 해 8월 25일 이방원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였다. 신권과 왕권을 두고 벌인 조선 최초의 권력 투쟁으로 1차 왕자의 난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