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파탄 난 조선을 일으켜 세우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맞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광해군은 가장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왕이다. 성리학이 신앙이었던 사대부들이 광해의 최대 치적인 실리외교에 반발하였다.
광해도 이성계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라의 방향을 선회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성공했고 광해군은 좌절해야 했다.
1. 부왕의 질투를 견뎌내고 왕이 되다
방계 혈통이라 늘 부담이 컸던 선조는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조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의인왕후에게 태기가 없었다. 후궁이 낳은 14명의 아들 중 제일 위가 임해군, 광해군, 신성군이었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일찍이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다음이 광해군이라 좌의정 정철,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등이 모여 광해군을 추대하기로 약속하고, 정철이 앞장서기로 했다. 당시 선조는 신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이산해가 모략을 꾸몄다. 신성군의 어머니 인빈 김씨를 몰래 찾아가 정철 일당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 후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한 것이다. 정철은 경연장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 했고 서인들은 이런 정철을 거들었다가 모두 쫓겨났다.
임진왜란 발생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실시하여 광해군은 전장에서 그 능력을 보였지만 뜻밖의 난관에 봉착한다. 명나라에 광해의 세자 책봉을 알리는 고명사로 윤근수가 귀국해 "장자 임해군을 놓고 왜 동생이 세자가 되느냐"며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하지 않는 다고 전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의인왕후 사후에 들어온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의 나이가 쉰다섯이었다.
선조는 적통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기 원했으나 영창대군이 두 살이던 해에 선조는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선조는 고민 끝에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2. 조선의 이념을 건드리다
험한 과정을 극복한 광해군은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유배 보내고,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에게 이조판서, 이조전랑, 대간을 비롯한 주요 요직을 주었다. 또한 영의정에 서인의 이항복, 좌의정에 남인의 이원익을 임명해 연립 정권의 구색을 갖추었다.
명나라에서 서얼 출신이면서 차남인 광해가 왕이된 경위를 알아보겠다고 통보해 왔다. 임해군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창대군만 없애면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이첨과 포도대장 한희길 등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등을 집중 국문하여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그 배후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지목하게 됐다. 김제남이 잡혀와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인목대비와 김제남이 무당을 시켜 광해군을 저주한 일도 발각되었다.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도 강화도에 유배 보냈다가 강화부사를 시켜 죽였다. 이것이 광해군 5년(1613) 계축년에 '칠서의 옥'에서 비롯된 계축옥사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덕형, 이항복 등도 퇴진한다.
이후 정권은 대북파가 독점한다. 이들은 인목대비까지 없애려 했으나 광해가 거절했다. 그래서 암살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폐비하자고 주장한다. 광해는 이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즉위 10년째인 1618년에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다. 광해보다 인목대비가 나이는 어렸지만 엄연한 어머니였다. 그런 인목대비를 폐한다는 것은 조선의 이념에 맞지 않았다. 이로써 광해는 조선 사대부들에게 공적 1호가 된다.
3. 조선 최초의 공평과세 대동법과 허균의 등용
광해는 정적 제거에는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두었지만 외교나 내정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즉위 초 선혜청을 설치해 대동법을 추진했다. 조선 최초의 공평 과세인 대동법은 조세혁명이라 할 수 있는데 워낙 파격적이라 우선 경기도부터 적용했다. 대동법은 모든 공납을 오직 쌀이나 포로 대신 받는 과세 제도다. 또한 농지가 없는 소작
인은 면세하고 지주에게만 과세해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 외에 양전 사업과 <동의보감> 간행 등도 광해군의 대표적 친서민 정책이다.
양전 사업은 임진왜란에 의한 인명 피해와 3분의 1로 줄어든 농토의 현실을 파악해 양반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실시한 제도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광해군이 적극 도와 빛을 보았다. 동의보감은 전국에 배포되어 백성들의 건강 서적이 되었다.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이며 최고의 혁명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이 탄생했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오빠로 전라도 부안에 은둔하고 있다가 광해의 신임을 회복해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판까지 올라 누구보다 '인목대비 폐비론'을 강력히 주장해 성사했다. 허균은 왕조체제를 전복시키고 반상과 적서, 남녀, 계급, 빈부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꿨다. 아무리 급진적인 광해라지만 왕조 체제를 전복하려는 허균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4. 광해와 북인의 동상이몽 그리고 인조반정
임진왜란 때 왕과 양반은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세자 광해군만이 남아 백성들과 전선을 누볐다. 백성들은 이런 광해군이 즉위하자 환호했고 광해군은 실용 정책을 펴 백성의 열망에 부응했다. 그 과정에 대북 세력이 동참했다.
선조는 인재를 잘 분별해 등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을 활용할 비전과 기술이 부족했다.
광해군은 그 반대였다. 원대한 비전은 있으나 이를 함께 이룰만한 인물 선정에 약했다.
대북 세력은 광해군과 동상이몽이었다. 왕권에 기대 정권 유지에 더 몰골했을 뿐 나라를 위한 원대한 비전은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북인의 권력 독점욕을 막지 못해 폐모살제(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라는 악수를 두어야 했다.
당시 사대부는 백성에게 성리학적 충효를 강요할 뿐 성리학적 애민정치는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이런 사대부와 맞서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며 백성의 안녕을 지켜주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백성에게는 성군이었지만 사대부에게는 폭군이었던 것이다.
서인들은 반정의 명분이 약하기 때문에 '선조 독살설'을 만들었다. 인조반정은 역대 반정 중 명분이 가장 취약한 반정이었다. 이미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택군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은 유사시 자신들이 왕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신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적 정책을 추구했다. 그런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파는 소수인 데다 각기 속셈이 달랐다. 그래서 서인들이 무능한 인조를 앞세워 광해군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광해가 이룩한 십수 년간의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광해군이 계속 통치했다면 조선은 조총부대가 더 커지면서 동북아 최강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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