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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순조(재위 1800~1834), 헌종(재위 1834~1849), 철종(재위 1849~1863)

by y2ryang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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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어진

    

    정조 이후 순조 때부터 나라의 중심을 잡는 왕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고 세도정치가 횡행한다. 

    순조 35년, 헌종 15년, 철종 15년의 65년 간 안동 김씨가 60년간 세도를 부렸다.

    세 왕은 신하에게 권한을 위임하기는 커녕, 도리어 세도가로부터 한정된 권한만 위임받고 얼굴마담 노릇을 했다.

 

1. 순조의 배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순조는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조가 사랑했던 의빈 성씨(성덕임)가 낳은 문효세자가 다섯 살 때 홍역으로 죽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정조가 마흔이 다 될 무렵에야 순조를 얻었다.

    다시 10년 후 정조가 급서 하면서 순조가 즉위했다.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관례를 깨고 국장 중에 심환지를 영의정에, 친척 김관주를 이조참판에 임명했다. 이후 정조의 탕평을 도운 인물들을 내쫓고, 정조가 축출한 노론 벽파 인물들을 불러들였다.

    심환지는 정조가 만들고 김조순 등 시파가 주도한 장용원을 해체하고, 규장각까지 대폭 축소한다. 그런 다음 1801년 1월 사대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선왕 정조의 뜻이라며 궁궐 등에 속한 노비 6만 6천 명을 양인으로 풀어주었다. 그날 노비원부도 불태웠다. 

    다시 조선을 노론 벽파 세상으로 만든 정순왕후의 최대 치적으로, 힘 있는 보수가 파격적 개혁을 한 사례였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묵인했던 천주교를 인륜을 부정하는 무군무부의 사학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금지한다. 이로써 남인과 소론, 그리고 시파까지 숙청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로 이어졌다. 정약용은 배교하는 바람에 겨우 참형을 면하고 강진으로 귀양 갔다.

 

    정순왕후는 심환지가 노환으로 쓰러진 1802년 10월, 정조의 유지를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순원왕후로, 장차 헌종과 철종에 걸쳐 10년간 수렴청정을 한다.

    1805년 정순왕후는 예순한 생을 마쳤다.

 

2. 안동 김씨 김조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노리는 가운데, 정순왕후를 잃은 벽파는 병인갱화에 의해 대부분 숙청되며,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외척 중심의 정치가 시작되면서 과거제도조차 형식만 남는다. 매관매직이 횡행하며 백정이나 천민도 돈만 있으면 양민이 되는 등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3. 홍경래의 난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10여 년을 준비한 민란이 1811년 12월에 일어난다.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빈민, 노동자, 유랑민과 보부상, 몰락한 양반이 규합한 대규모 난으로 서북인 차별 철폐와 세도정권 타도를 내세웠다.

    홍경래는 사마시에 낙방한 후, 세도가의 자제는 과거를 보지 않아도 급제하고 서북 출신은 아무리 우수한 답안지를 내도 낙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세상을 뒤엎을 결심을 하고 동조자를 찾던 중 양반의 서자였던 우군칙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역노 출신 이희저를 포섭했다.

    이들은 봉기한 지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는 등 4개월간 평안도 일대를 석권했다. 관군이 정주성을 포위하고 대포까지 동원해 총공세를 펼쳤지만 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봉기군은 신분을 완전히 타파하고 모든 재화를 공평하게 분배하며 서로 힘을 합쳐 관군에 저항했던 것이다.

    1812년  4월, 관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주성 아래 굴을 파고 다량의 화약을 매설한 다음 성을 폭파했다. 그날 전투에서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생포된 봉기군 모두 처형됐다.

 

    순조는 세도정권의 전횡을 막아보고자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보기로 했다. 이후 효명세자는 개혁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안동 김씨의 핵심 인물을 축출하고 남인 등 반외척 세력을 다시 등용했다. 이 시기에 풍양 조씨의 세력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쉽게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에 위독해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4. 헌종의 배후,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효명세자 급서 후, 순조도 희망을 잃고 앓다가 4년 만에 승하했다. 여덟 살의 어린 헌종을 대신해 순원왕후 김씨가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이는 1840년 12월까지 약 7년을 이어갔다.

 

    헌종이 친정하면서 어머니 조대비가 친척을 대거 등용했다. 친정아버지 조만영이 다시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이 되었고, 동생, 조카 등은 청요직에 포진했다. 다시 풍양 조씨 세력이 우세해졌다.

    헌종이 세도정치에 이끌려 다니자 역모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헌종 2년 '남응중의 모반'과 헌종 10년 '민진용의 역모'가 그것이다. 둘 다 몰락한 양반과 중인이 임금을 우습게 보고 왕권에 도전한 사건이었다.

 

    헌종은 즉위 15년 만인 1849년 스물세 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5. 안동 김씨가 세운 철종

 

    순원왕후는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강화도로 유배 갔던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지명하고 철종으로 세웠다.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 계승에 개입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왕실의 누구도 은언군의 여섯째 아들 이광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이원범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은언군의 아내와 며느리는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은언군은 이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신유박해 때 사약을 마셨다. 

    가정이 풍비박산한 상황이었다. 이원범은 교육은 커녕 생존을 위해 나무꾼 노릇을 해야 했다. 

    안동 김 씨들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정치에 문외한인 이원범을 선택한 것이다.

 

    열아홉 나이에 왕관을 쓴 철종은 정치를 모른다는 이유로 3년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852년 친정을 시작한 철종은 빈민구제에 애를 썼다. 하지만 친위 세력이 전무한 데다 세도 가문의 반발로 더 이상의 개혁 정책은 추진하기 어려웠다. 당시 영의정은 김조순의 3남 김좌근이었다. 벼슬아치들은 출세하려면 김좌근의 애첩 나합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이어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과 외교를 맺고,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도 청나라에 다녀온 연행사들의 보고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알게 되었다. 이를 알면서도 권세가들은 대비책을 세우기보다 여전히 신분질서를 세우며 권력 놀음에 취해 지냈다. 왕조의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60년,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인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교리로 동학을 창시하였다. 봉건제도의 악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조선에 인간평등의 후천개벽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정에서 동학을 민심 현혹 종교로 규정하고 금지했고, 최제우를 혹세무민죄로 처형했다. 그럼에도 동학의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철종이 죽자, 권력에 취해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안동 김씨들은 우왕좌왕했고, 이 틈을 타 조대비가 흥선군 이하응과 밀약해 고종을 왕으로 세웠다. 조대비는 자신의 섭정 권한을 흥선대원군에게 위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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