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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현종(재위 1659~1674) 목차1. 기해 예송 논쟁2. 15년 천재지변과 예송 논쟁     현종은 조선 역대 왕으로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유일하다. 조선 땅이 아닌 청나라에서 출생했고, 왕비를 한 명만 두었으며, 재위 기간을 예론(禮論) 논쟁으로 보낸 점이다. 이 시기 서구에서는 뉴턴의 물리학 등 과학의 기초이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들이 치열하게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도 네덜란드 등과 통상하며 선진 문물을 도입하기 바빴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조선은 최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한 '예론'으로 세월을 보냈다. 1. 기해 예송 논쟁     현종은 아버지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에 태어났다.     현종 즉위와 동시에 1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효종의 상중..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인조(재위 1623~1649), 효종(재위 1649~1659) 목차1. 서인들 세상이 열리다2. 외교 분쟁이 전쟁으로3. 삼전도의 비극4. 효종의 북벌정책      두 왕의 통치 기간은 인조 26년과 효종 10년을 합쳐 36년이다. 세계사적으로는 대항해 시대로, 산업혁명의 물적 토대가 축적되고 있었다. 소현세자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도층인 사대부와 왕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백성의 반청 정서를 강화하는 북벌만 외쳤다. 실현 불가능한 구호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력 집결에 마이너스가 될 뿐이다.     리더는 개인의 입지 확보를 위한 선동성 구호가 아니라 공동 번영에 맞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그 비전은 '예측과 측정'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감을 얻고 리더 자신도 당당한 자신감을 갖는다. 1. 서인들 세상이 열..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광해군(재위 1608~1623) 목차1. 부왕의 질투를 견뎌내고 왕이 되다2. 조선의 이념을 건드리다3. 조선 최초의 공평과세 대동법과 허균의 등용4. 광해와 동인의 동상이몽, 그리고 인조반정      임진왜란으로 파탄 난 조선을 일으켜 세우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맞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광해군은 가장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왕이다. 성리학이 신앙이었던 사대부들이 광해의 최대 치적인 실리외교에 반발하였다.     광해도 이성계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라의 방향을 선회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성공했고 광해군은 좌절해야 했다. 1. 부왕의 질투를 견뎌내고 왕이 되다     방계 혈통이라 늘 부담이 컸던  선조는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조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의인왕후에..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선조(재위 1567~1608) 목차1. 당쟁의 시초가 된 이조전랑 자리2. 인사권이 야기한 붕당, 동인과 서인3. 망명 정부 구상4. 선위 파동과 전쟁영웅 핍박      선조는 재위 기간이 41년으로 영조, 숙종, 고종 다음으로 길다. 즉위 25년에 7년간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다.     선조는 영특했지만 전체를 총괄하는 리더십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의무는 싫어하면서 권리는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선조 치세는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 인재가 많았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서애 유성룡, 그리고 이순신, 권율, 곽재우, 허균 같은 인재를 모아놓고도 국력 신장을 이루지 못했다. 1. 당쟁의 시초가 된 이조전랑 자리     중종의 아들은 모두 9명으로 대윤과 소윤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인종(재위 1544~1545), 명종(재위 1545~1567)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었으며 자식이 없었고, 다음 장경왕후는 1515년 세자 호(인종)를 낳고 곧 죽었다. 2년 뒤 중종과 혼인한 문정왕후가 1534년에 환(명종)을 낳았다. 두 왕 모두 하늘이 낸 대효라고 백성의 칭송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사적인 효심으로 공적 권위를 훼손했다. 문정왕후에게 매어 마마보이 노릇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 인종     인종은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고, 성질이 고약한 문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문정왕후가 서른다섯 살 늦은 나이에 경원군(명종)을 출산했을 때 세자는 이미 스무 살이었다. 이때부터 세자를 대하는 문정왕후의 눈길이 더욱 싸늘해졌다.      1543년 1월, 세자가 잠들었던 동궁전에 불길이 치솟았다. 윤임이 조사해 보니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중종(재위 1506~1544) 목차1. 갑자기 씌워진 왕관2. 조선 최초의 필화사건과 조광조의 등용3. 기득권 청산은 인재 등용 방식의 변화로부터4. 조광조와 중종의 동상이몽이 만든 기묘사화      연산군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조선이 중종의 약 40년 치세 동안 조광조를 발판 삼아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신하를 질투한 왕으로서의 중종은 그 그릇이 너무 작고 우유부단하였다. 조광조는 정도전에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인재였다. 그의 죽음이야말로 중종의 한계를 드러낸 최대 실책이었다. 1. 갑자기 씌워진 왕관     연산의 왕관을 벗긴 신하들은 진성대권의 집에 몰려가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박원종 등이 엎드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진성대군은 공신들의 강요에 눌려 받아들여야 했다. 즉..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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