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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연산군(재위 1494~1506) 목차1. 외로운 왕자2. 사림파를 숙청한 무오사화3. 훈구파를 버린 갑자사화4. 소통을 차단하다5. 모두를 내쫓고, 모두에게 내쫓기다      조선은 태조가 문을 열고, 태종이 기반을 닦았으며, 세종 때 가장 융성했다. 그 풍요로운 기세가 세조를 지나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된 탓인지, 성종 말기에 퇴폐풍조가 조장되었다. 왕이 여색을 밝히며 비빈들끼리 갈등의 골이 깊어져 연산군 때 대학살의 빌미를 남겼다.      최악의 리더의 공통점은 첫째, 조직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며 둘째, 소통 형식이 하향식이고 셋째,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적다. 연산군처럼 왕이 왕관의 가치를 귀히 여기지 않고 왕관을 희롱하면, 신하들도 공적 업무는 대충 하고 사적 연줄 잡기에 급급해지며 민심은 떠난다. 수..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성종(재위 1469~1494) 목차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실 담합으로 즉위하다2. 정중동에 능했다3. 정몽주가 뿌리인 사림을 중앙 무대로4. 성종의 핵심 인물, 김종직     조선 역사상 전대 왕이 승하한 다음 날 바로 왕이 된 유일한 왕이 성종이다. 나이 열세 살에 즉위하였고 정희왕후는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라 7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성종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정희왕후는 기꺼이 수렴청정에서 물러났으며 권력을 넘겨받은 성종은 기다렸다는 듯 탁월한 통치술을 발휘하게 된다.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실 담합으로 즉위하다     예종이 승하하자 재상들은 일제히 정희왕후에게 달려갔고, 정희왕후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이미 한명회 등의 원상들과 은밀히 논의한 결과였다. 적통원자인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왕..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예종(재위 1468~1469) 목차1. 왕을 보호할 신진세력을 제거하다2. 신진세력을 내친 후 적폐청산을 시도했더니     태종이 세종을 알아본 것처럼 세조도 성군을 후계자로 세우길 원해 즉위 후 장남 숭을 의경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2년 후 의경세자는 요절했고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그가 곧 예종이다. 즉위할 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지만 모후 정희왕후와 세조의 공신인 원로 중신들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대비가 되어 왕과 사대부의 나라에서 최초로 수렴청정을 펼치며 여왕 이상의 지위를 누렸다. 1. 왕을 보호할 신진세력을 제거하다     세조가 성군이 되길 고대한 의경세자는 열아홉 살에 요절했다.  의경세자는 특별했다. 예의가 바르며 학문을 좋아했고 사치를 멀리하고 질박하여 민심을 샀다. 세조가 태종을 닮았다면 의경세자..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세조(재위 1455~1468) 목차1. 진흙에서 찾은 보배, 한명회2. 살생부와 천지개벽3. 대세 장악 후 이미지 고양과 즉위4. 사육신과 생육신5. 역모로 몰린 한명회와 신숙주      세조는 결과중심적 리더였다. 사회적 가치와 자기 욕망이 충돌할 때면 사회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욕망 추구를 합리화한다. 그 결과 과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승리의 쟁취에 전념한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으나 세종의 아들 세조는 가족을 제거하고 왕이 된 패륜의 군주였다.    태종과 세조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장자가 아니라서 왕위 계승에서 밀렸지만 개인의 지략과 집념으로 왕이 되었다. 두 왕 모두 권력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1. 진흙에서 찾은 보배, 한명회     태종이 즉위과정에서 형제를 없앴다면, 세조는 동생과..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문종(재위 1450~1452), 단종(재위 1452~1455) 목차1. 백면서생 문종의 애잔한 애정사2. 단종의 고명대신과 수앵대군의 기 싸움       왕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여러 가지이다. 자신감, 동기부여 능력, 관계 구축력, 스트레스 회복력, 조직 감각력, 통찰적 지향성, 추진력, 판단력 등이 요구된다.     "그대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왕을 만날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어떤 왕보다 그대들을 더 사랑하는 왕으로 남고 싶소"    리더는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어야 하며, 위로받기보다 구성원의 고뇌를 위로해 주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    문종과 단종이 왕으로서 중심만 잡았어도 수양의 찬탈은 없었을 것이고, 연산 같은 폭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 백면서생 문종의 애잔한 애정사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선대왕이 부족했다면 후대왕이 조금만 잘해.. 2025. 2. 26.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세종(재위 1418~1450) 목차1.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다2. 천것도 내 백성이다3. 왕의 낯빛을 살펴 발언하지 말라4. 최초의 국민투표5. 백성과 소통하는 도구를 허하라     세종은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의 왕 중 최고의 명품 리더십을 펼쳤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에서 언급한 부족사회의 문화 제작가 브리콜뢰르(bricoleur)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 레오나르도 다비치,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이 브리콜뢰르의 리더십을 구사했다.        세종은 신하는 물론 백성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했다.       "조선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이것이 세종의 통치철학이었다. 1.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다     이도는 스..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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