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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세조(재위 1455~1468) 세조는 결과중심적 리더였다. 사회적 가치와 자기 욕망이 충돌할 때면 사회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욕망 추구를 합리화한다. 그 결과 과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승리의 쟁취에 전념한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으나 세종의 아들 세조는 가족을 제거하고 왕이 된 패륜의 군주였다.    태종과 세조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장자가 아니라서 왕위 계승에서 밀렸지만 개인의 지략과 집념으로 왕이 되었다. 두 왕 모두 권력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1. 진흙에서 찾은 보배, 한명회     태종이 즉위과정에서 형제를 없앴다면, 세조는 동생과 조카를 없앴다. 이런 일을 수행하려면 엄청난 지략을 갖춘 책사가 필요한데, 태종에게는 하륜이, 세조에게는 한명회가 있었다.     어린 단종을 보필할 왕족 .. 2025. 2. 28.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문종(재위 1450~1452), 단종(재위 1452~1455) 왕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여러 가지이다. 자신감, 동기부여 능력, 관계 구축력, 스트레스 회복력, 조직 감각력, 통찰적 지향성, 추진력, 판단력 등이 요구된다.     "그대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왕을 만날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어떤 왕보다 그대들을 더 사랑하는 왕으로 남고 싶소"    리더는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어야 하며, 위로받기보다 구성원의 고뇌를 위로해 주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    문종과 단종이 왕으로서 중심만 잡았어도 수양의 찬탈은 없었을 것이고, 연산 같은 폭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 문종: 백면서생 문종의 애잔한 애정사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선대왕이 부족했다면 후대왕이 조금만 잘해도 인정받지만, 선대왕이 세종 같이 출중하다면 후대왕은 그늘에 묻히기 마련이다. 문종.. 2025. 2. 26.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세종(재위 1418~1450) 세종은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의 왕 중 최고의 명품 리더십을 펼쳤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에서 언급한 부족사회의 문화 제작가 브리콜뢰르(bricoleur)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 레오나르도 다비치,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이 브리콜뢰르의 리더십을 구사했다.        세종은 신하는 물론 백성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했다.       "조선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이것이 세종의 통치철학이었다. 1.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다.     이도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다. 오래나 가뭄으로 백성의 3분의 1이 유랑민이 되었다. 이런 난국에 즉위한 세종의 첫 일성은 "어진 정치를 펴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왕 노릇을 하.. 2025. 2. 26.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태종(재위 1401~1418) 목적 달성에 효과적이기만 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태종은 한 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으며 원하는 목적을 확실히 이루었다. 태종 같은 결과 지향적인 리더들은 항상 '왜'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 다음 그 해답으로 '어떻게'를 찾는다. 즉, 과정은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태종의 리더십     첫째, 목적에 부합하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 탁월했으며 무엇보다 핵심을 짚을 줄 알았다.              그 결과 태조 이성계의 날개인 정도전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어떠한 비난도 감수할 줄 알았다.             리더의 기본책무는 가치평가에 따른 방향 제시다. 이를 실행하다 보면 본의와 달리 찬반이 생겨난다.    셋째, 무엇보다 행동력이 탁.. 2025. 2. 26.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정종(재위 1398~1400) 왕관을 쓰려는 자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아니면 왕이 되려 하지 말고, 어쩌다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만두어야 한다. 정종은 천성은 착했으나 권력의지와 냉혹한 정치 현실을 간파할 지략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 운명에 몸을 맡기다.     정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방과이다. 1398년 8월, 마흔둘의 나이로 왕세자가 되고 같은 해 9월에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치세 2년 만에 자진해서 물러났다. 그 배경에 태조 이성계의 아들 8명이 벌인 권력 투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6남과 경신, 경선 2녀를 두고 있었고, 조선 개국 1년 전에 사망하게 된다.     신덕왕후 강씨는 방번, 방석 .. 2025. 2. 26.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 태조 이성계는 변혁의 리더였으며 이에 맞는 창조적 혁신 전략을 구사한 인물로 평가된다. 1. 변방에서 중앙으로     이성계는 변방의 장수였다. 1258년에 동북면을 강탈한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고, 이곳에서 이자춘은 촌장을 지내며 차남 이성계를 낳았다.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원나라를 압박하던 시기에 이자춘은 고려의 공민왕을 찾아가 고려의 옛 땅을 수복하겠다고 하였고, 99년 된 쌍성총관부를 몰아냈으며 당시, 이성계도 이자춘을 도와 공을 세웠고 그때부터 이성계는 친명파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 10만 대군이 개경까지 내려와 공민왕이 충주로 피란 갔을 때에도 이성계가 사병을 동원하여 개경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나하추가 수만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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